
이하석 시인
#느린 우체통
얼마 전 문득 편지를 받았다.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봉투를 뜯으니, 흰 종이에 빼곡히 쓴 글이 나왔다. "이형, 청(靑) 바다가 밀려오고 있소, 그래서 쓰오. '우리는 고독 속에서 또는 대중 집회의 군중 속에서 상처 주고 상처를 받으며 이 시대와 직면하고 있기에' 그 고독의 힘을 빌어서 쓴다고 할 수도 있소"라는 서두의 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보낸 이가 바로 나였다. 서두에 인용한 말은 파블로 네루다의 산문(자서전)에서 따온 듯하다. 어디서 쓴 편지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울산 바닷가. 간절곶. 작은 카페 구석에 앉아 나는 네루다를 읽고 있었을까? 그 바닷가에는 빨간 우체통이 있었고, 그 우체통은 여행객들이 쓴 편지들을 머금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배달됐다. 나는 카페에서 내게 쓴 편지를 나의 주소를 적은 다음 그 우체통에 넣은 것이다. 그 편지를 거의 1년 만에 받았다.
나는 그때 혼자 여행 중이었고, 외로움을 되씹으면서 글 쓰며 사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까? 편지에는 그런 나의 자책과 함께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기대감도 드러난다. 어쨌든, 뜻밖이었다. 새삼 아득한 시간을 지나서, 기약 없이 떠도는 한때의 '대책 없는' 나를 '너무나 반갑게' 만난 것이다.
최근 '느린 우체통'에 관한 한 기사를 보면서 새삼 그때를 떠올린다. 기사 내용은 경주 보문관광단지 방문객들이 보문 호반광장의 우체통에 다양한 추억을 담아 발송한 사연을 6개월마다 전 세계로 배송하는데, 올해 상반기 배송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 '느린 우체통'은 관광객들이 여행 중 직접 쓴 엽서를 일정 기간 후에 수령할 수 있게 운영되는 감성 서비스다. 여행의 추억을 되새기고 소중한 사람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단다. 계절별로 디자인된 엽서는 수신인에게 여행 당시의 감동을 다시 한번 선사한다고 운영자들은 말한다. 이 서신 전달 체계는 단순한 우편 서비스 이상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는 말도 한다.
그러고 보니,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느린 우체통'들이 놓여 있음이 확인된다. 강릉의 안목해변에서도 보았다.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도 있는 듯하다. 또는 괴산의 산막이옛길에서도 본 듯하다.
'느린 우체통'은 과거의 통신 수단을 새롭게 불러들인 것이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우체통은 비현대적인 통신방식이다. 전자 통신의 발달로 이런 손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한 즉시 발송에 익숙한 청소년과 아이들은 물론 과거 편지를 우체국을 통해 주고 받았던 경험이 있는 기성세대들조차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발송에 6개월이나 1년이 걸리는 '느린 우체통'은 더욱 효율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신기한 경험으로 '느린 우체통'을 수용하여 엽서나 편지를 쓰는 모습이 이색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아보는 이의 느낌은 아주 각별하고, 신선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 이거야말로 '비현대적'의 현대성이 아니겠는가?
#창작 기반부터 다져야
친구의 시집 출간을 축하하는 식사 자리를 가졌다. 시집을 읽은 소감들이 얘기되고, 내용에 관한 질문과 더불어 시인의 소회를 듣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요즘의 글 쓰기'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특히 인공지능(AI)의 글쓰기 수용 여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다. 인상적인 것은 민감하면서도 복합적인 이미지의 충돌을 통한 새로운 각성을 보이는 그 시인이 인공지능의 챗gpt를 활용한 시 쓰기를 이미 시도해 보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아직은 실망을 금치 못하는 단계'라면서 여전히 시는 수공업적인 글쓰기를 통해서 더욱 팽팽한 긴장감과 창조성을 가진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사회에서 인공지능은 첨단적 현대성의 대명사로 꼽힌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의존해서 글을 쓰는 이는 아직은 드물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새삼 시의 현대성에 대한 논의가 일었다. 보들레르는 "현대성이란 자기 통제된 낭만주의, 그 관습과 과도함이 청산된 낭만주의, 그리고 특히 역사의 현재에 깊이 닻을 내린 낭만주의다"라고 정의했다. 이는 고전주의에 맞서 제시한 새로운 세계성의 구조를 보여주려 한 말로 받아들인다. 현재 우리 문학의 현대성은 이와 다른 또 다른 '역사의 현재에 깊이 닻을 내린' 언어 구조가 될 것이다. 인공지능을 통한 작업과는 다른 차원의 현대성이다. 우리의 많은 작가와 시인들은 여전히 맹렬하게 자기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수공업적인 각고를 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여전히' 우리 문학의 한 중심 흐름이 되는, 곧 가장 현대적인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선서 뒤 연설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던 백범 김구의 꿈을 언급했다. 그는 지난달 30일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대통령실로 초청, 문화강국의 초안을 내놓았는데, 특히 문화콘텐츠산업 발전에 대한 기대를 크게 나타냈다.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는 지난달 문체부 업무보고에서 K컬처 시장 300조 원 시대, 문화 수출 50조 원, 글로벌 소프트파워 빅5 등을 이 대통령 임기 내 달성하겠다고 내다보기도 했다.
기대되는, 그야말로 현대적인 전망이다. 그러나 이런 초현대적인 문화정책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인공지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창작자들의 각각의 수공업적 각고의 자세를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비록 비현대적인 작업이라 해도 그것이야말로 쉬 변할 수 없는 우리 문화의 첨단을 향한 위대한 몸짓(그 의식 자체가 현대성을 유지하는 한)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다시는 블랙리스트 같은 반문화적 작태가 없어야 하지만, 아울러 어렵지만 안간힘으로 버텨내고 있는 작가들의 창작 기반 강화가 무엇보다 우선 강조되어야 한다. 이에 관련된 예산들이 지난 정권 이후 줄줄이 깎이고 있는 현실에서 절실하게 갖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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