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만진 소설가
8월29일은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이다. 경술(1910)년 8월29일에 나라[國]가 부끄러운[恥] 일을 당했다는 뜻이다. 국권을 일제에 빼앗겼으니 달리 변명할 말이 있을 수 없다. 올해 2025년은 독립 80주년이지만 경술국치 115주년이기도 하다. 둘 다 잊어서는 안 된다.
1873년 8월29일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탄생했다. 그로서는 37세 생일날 나라가 망했다. 1876년 8월29일 독립운동가 김구가 출생했다. 그로서는 34세 생일날 조국이 사라졌다. 1912년 8월29일 손기정이 태어났다. 그로서는 경술국치일이 생일날이 되었다.
1910년 8월29일 금산군수 홍범식이 자결했다. 향년 아직 39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가족들에게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요지의 유서를 남겼다.
순절 직전 홍범식은 금산지방법원 서기 김지섭을 불러 유서가 담긴 상자를 관사로 배달시켰다. 김지섭은 1924년 1월5일 일본 도쿄 왕궁에 폭탄을 던져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독립지사이다. 홍범식은 김지섭의 사람 됨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홍범식은 유서 상자 안에 김지섭에게 보내는 글을 남겨놓았다. "나는 죽음으로써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 한다. 그대도 관직을 떠나 다른 일을 하도록 하라." 군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남긴 당부말에 김지섭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김지섭 지사가 남긴 옥중시 '죽음에 대한 생각[死觀]'은 읽는 후대인에게 충격을 준다. 시의 전반부는 "사람의 일생은 길어야 백년이다/ 세상에 태어나면 이미 죽음이 뒤따른다/ 달은 머잖아 어두운 밤으로 돌아가고/ 꽃은 열흘도 안 되어 진흙으로 떨어진다"이다. 김지섭 지사가 죽음을 앞두고 지은 시가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지상 최고의 아름다운 존재로 여겨지는 달과 꽃의 짧은 소멸을 인생 허망의 비유로 원용한 놀라운 표현력 때문이다. 전문 시인들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경지 아닌가!
시의 후반부 또한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성인만 의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구차하게 살려들면 어리석음을 면하지 못한다/ 어디가 태평천국인가/ 청산은 말이 없고 어수선한 풀만 무성하다." 이른바 '소확행'을 추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아수라장 속 인생을 영위하면서도 최고의 삶이라 자위하는 인간의 아둔함 앞에서 우주는 말을 잃는다. 달도 꽃도 시한부라는 진실을 잘 알면서도 자신은 영생하는 양 인간은 살아간다. 그래도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종교를 만든 유일 존재가 인간이니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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