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저녁이 되면, 나는 가끔 계명대 성서캠퍼스의 트랙 위에 선다. 가깝지 않은 거리지만 일부러 집을 나선다. 도시의 소음은 점차 멀어지고, 캠퍼스의 불빛이 차분히 마음속에 내려앉는다. 하루가 끝났다는 사실을 몸으로 실감하면서도, 내겐 아직 남아있는 마지막 의식(ritual)이 있다. 달리기다. 어느 순간부터 달리기는 운동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존재 방식이 되었다. 체력을 위해 시작한 운동습관은 신체를 유지하는 보호막이자, 무엇보다 영혼을 고양시키는 나만의 길이다.
말하지 못한 문장들, 쏟아내지 못한 감정들, 흩어진 생각들이 땀과 함께 흘러나가고 가쁜 호흡 속에서 풀려난다. 세계적인 작가이자 고독한 러너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한다. "고통이 없다면 쾌감도 없다. 고통과 쾌감은 쌍둥이다." 그렇다. 중력을 거스르는 달리기는 고통의 연속이자 절정이다. 다리는 무겁고 숨은 가쁠수록 이상하리만치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고요와 마음의 평화가 깃든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자라나는 믿음과도 같다.
트랙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공간에 있다. 우리는 대부분 하루를 작고 네모난 큐브 안에서 보낸다. 방, 사무실, 차 안, 버스와 지하철, 카페와 마트—벽에 둘러싸인 공간이 그렇듯. 하지만 트랙은 다르다. 아무런,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로지 나의 페이스에 맞춰 달릴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트랙은 400m의 원형이다. 시작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공간구조 속에서 나는 어디서든 출발할 수 있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 같은 트랙을 달리지만 마음이 늘상 다른 것은 단순 반복이 아니라 반복이라는 차이 때문이다. 즉 변화하는 감정과 내면의 순례라는 사실. 바슐라르도 '공간의 시학'에서 "공간은 감정을 기억하는 그릇"이라 말하지 않던가. 이 타원의 공간은 내 감정의 잔반을 모두 비워내고 다시 채우는 그릇이다. 달리기는 그렇게 단순한 운동과 움직임을 넘어 마음과 호흡을 회복시키는 과정이 된다.
여름밤, 드넓은 운동장에 바람이 분다. 절반은 순풍이고, 절반은 역풍이다. 그 교차하는 자연의 리듬 속에서 나는 위로와 저항의 방식을 배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문학과 예술의 양식이 "현재에 거주하지만 묘하게 현재에서 벗어나 있다"면,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어둠 속에서도 이어지는 학생들의 발걸음과 숨결은 캠퍼스의 밤을 밝히는 작은 불빛 같다. 낮에는 강의실에서, 밤에는 운동장에서 저들의 트랙, 저들의 젊음은 내일의 희망을 예고한다. 꿈꾸는 자들은 언제나 길 위에 놓여있게 마련이다.
달리기, 그것은 운동이 아니라 존재를 견인하는 방식으로서 철학이며 신학이다. 하루키에게 매일의 달리기가 글쓰기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듯, 우리 또한 일상의 러너다. 크고 작은 고통을 감내하며 우리는 그 속에서 생의 즐거움과 환희를 찾는다. 카를 라너에게 있어 일상(의 신학)은 비일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된다. 먹고 자고 눕고 걷는 일상의 사소한 행위 속에서도 우리는 사소한 장엄함을 발견하고 향유할 수 있다. 달리기라는 리추얼에도 단조로운 반복 속에 관조와 정화, 수행의 리듬이 숨어 있다.
트랙은 사막과도 같다. 텅 비어 있으나 그 공허 속에서 생의 우선순위가 드러난다. 달리기의 본질은 주어진 한계 속에서 자신을 연소시키는 일이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겸손을 배우는 달리기, 그 실존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나를 새롭게 알고 느끼며 각인시킨다.
저녁이다. 나는 오늘도 트랙 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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