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은 영화평론가
영화 '휴가'로 파업노동자의 씁쓸한 일주일을 담담히 묘사했던 이란희 감독이 이번에는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학생들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노동자들의 모습을 다룬다는 점은 같지만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인 만큼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고 활기차다. 대단한 사건이나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좋은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훌륭한 예다.
'창우'(유이하)는 3형제 중 맏아들이다. 아버지가 사고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일찍 철이 들었다. 그는 학교를 다니며 어린 막내를 돌보고, 집안일을 돕고, 취업을 준비한다. 중견기업 면접에서 떨어진 창우는 대학지원과 병역특례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중소기업 인턴으로 들어간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실전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고, 선임들에게 혼이 나기도 하지만 창우는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간다. 먼저 일을 시작한 또래들도 사귀고, 친절한 사수도 만나고, 몰랐던 재능도 발견하면서 창우는 그렇게 조금씩 사회인이 된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겪어왔던 시기이기에 공감대가 크다.
물론, 창우도 크고 작은 사건들과 내적인 갈등을 겪는다. 교복과 작업복을 번갈아 입고 있는 그에게는 아직 확실한 것이 없다. 월급의 달콤함을 맛본 뒤에도 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지 창우의 고민은 계속된다.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시스템 속에서 공장 직원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창우도 그 피해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직 일이 미숙한데도 회사 일정에 따라 야근까지 감수하다 생긴 사고다. 그러나 이런 문제나 어려움을 담임이나 복지사에게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창우에게 회사라는 조직은 거대해 보이고, 그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학년 2학기'는 엄마에게조차 속내를 잘 말하지 않을 만큼 내성적인 창우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미래를 결정해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다. 주인공의 성격만큼이나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카메라의 시선이 진실되고 순수하게 다가온다.
'3학년 2학기'의 매력은 창우의 주변 인물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창우의 절친인 '우재'(양지운), 공장에 먼저 들어온 '성민'(김성국)과 '다혜'(김소완)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각기 다른 선택을 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때로 미숙해 보이지만 싱그러운 신인들의 얼굴 때문에 연신 미소를 짓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수학능력고사가 치러지는 날, 창우와 친구들이 공장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다. 학생이면서 근로자인 이들은 수능을 뉴스로 접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사회는 대학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만 응원하고 있지 않은지, 학교에서 곧장 사회로 나갈, 아니 이미 근로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소외되어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올해도 수학능력고사가 48일 앞으로 다가왔다. 오는 11월13일에는 좀 더 일찍 근로자가 된 청소년들도 충분히 격려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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