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23> 삼성의 벤치마킹

  • 홍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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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0-02 15:08  |  발행일 2025-10-02
이건희 회장이 2000년대 초반에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서 LCD 모니터를 살펴보고 있다. <삼성그룹 제공>

이건희 회장이 2000년대 초반에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서 LCD 모니터를 살펴보고 있다. <삼성그룹 제공>

업의 개념


이건희 회장이 자주 쓰는 말 중에 '업(業)의 개념'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뜻은 사업은 저마다 독특한 본질과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업의 개념이란 그 업의 특성을 찾아 역량을 집중하는 것을 경영의 핵심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언젠가 이수빈 회장이 미국에 있다가 삼성생명의 회장으로 발령받아 이병철 회장에게 인사를 하러 왔는데, 부회장이었던 이건희가 방문을 나서는 이수빈 회장에게 "보험은 모집인이 전부입니다" 하고 한마디 던졌다. 당시 이수빈 회장은 "젊은 부회장이 보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저러나" 하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삼성생명을 경영해보니 보험회사는 그의 말대로 모집인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건희가 본 것은 바로 그 업의 핵심이 어디에 있느냐였다. 그는 보험에서는 경영보다도 모집인 관리가 최우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도 그는 전기·전자가 자동차 업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의 자동차는 엔진과 디자인이라고 여겨왔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즉 당시 자동차는 전기·전자의 비중이 25~30% 정도밖에 안 되지만, 앞으로는 50% 이상이 전기·전자로 대체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다. 일본도 이를 대비해 도요타, 닛산, 혼다 같은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에서 매년 300~500명씩 전기전자 기술자를 선발해 훈련시키고 있었다.


전자레인지의 경우 철판, 유리, 마그네트론(원반)으로 구성되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그네트론이다. 그는 전자레인지에서는 마그네트론을 중점적으로 봐야 하는데, 유리나 철판에 주목하는 것은 업의 근본 개념과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건희 회장이 전 계열사 사장단 워크숍에 참석해 핵심 인재 양성을 강조하고 있다. <삼성그룹 제공>

이건희 회장이 전 계열사 사장단 워크숍에 참석해 핵심 인재 양성을 강조하고 있다. <삼성그룹 제공>

가전제품의 경우도 그 업의 개념 자체가 일본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일본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를 업의 개념으로 본다. 그렇다고 무작정 일본 제품을 쫓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마이크로 오븐은 샤프와 산요 제품을 봐야 하는데, 엉뚱하게 마쓰시다 제품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삼성이 배워야 할 업의 개념의 1인자, 즉 그 분야에서 세계적인 노하우를 가진 회사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가 신경영 대장정 이후 삼성이 벤치마킹 대상으로 확정한 기업은 다음과 같다.


△전자 부문: 일본의 소니·마쓰시다 △중공업: 일본의 미쓰비시 △섬유: 일본의 도레이 △재고 관리: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애플 컴퓨터·페더럴 익스프레스 △고객 서비스: 제록스·노드스트롬 △생산 작업 관리: 휴렛팩커드·필립모리스 △마케팅: 마이크로소프트·헬렌 커티스·더 리미티드 △신제품 개발: 모토로라·소니·3M △구매 및 조달: 혼다·제록스·NCR △품질 관리: 웨스팅하우스·제록스 △판매 관리: IBM·P&G △물류: 허시·메리케이 코스메틱.


첨단기업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렇다면 위의 기업들에게 무엇을 배웠는가. 소니와 마쓰시다는 세계적인 대가전 회사들이다. 지금은 삼성이 소니와 어깨를 겨루고, 마쓰시다보다는 앞서가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두 회사가 모두 삼성보다 앞서 있었다.


소니는 미국의 GE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가전기업이다. 1946년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가 도쿄 긴자의 뒷골목에서 작은 벤처기업으로 출발한 도쿄통신공업회사가 그 출발이다. 이부카는 전기기술자 출신이었고, 모리타는 유명한 양조장 집 아들이었다. 기술은 이부카, 자금은 모리타가 대고 두 사람이 창업했다.


설립 이후 소니는 세계 가전 역사를 바꾸어놓는 신제품을 많이 생산해냈다. 1960년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 TV를 발매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대에는 워크맨으로 세계 시장의 새로운 유행을 창조했다. 오늘날에는 VAIO PC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2로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아이보 같은 로봇으로 시장을 공략하려 하고 있다.


소니의 힘은 새로운 기술 창조를 통한 시장 제패였다. 즉 "최고가 되려면 최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소니의 철학이었다. 이런 경영 전략으로 소니는 2001년 4월~2002년 3월에 7조5천783억엔(약 76조원)의 매출을 기록하면서 GE, 삼성과 더불어 세계 가전시장을 이끌어가는 글로벌 기업이 됐다.


마쓰시다 전기는 내셔널, 파나소닉, JVC 등의 상표로 잘 알려진 일본 굴지의 가전업체이자 세계적 기업이다. 창업주 마쓰시다 고노스케(1894~1989)는 '경영의 신'으로 불린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중퇴 학력이었다. 집이 가난해 남의 집에서 '애보개'를 하다가 오사카 시내에서 전차를 처음 보고 "앞으로는 전기의 시대가 올 것"이라 판단, 15세 때 오사카 전등회사에 입사했다. 이후 근면과 성실로 24세인 1918년에 마쓰시다 전기를 창업했다. 초창기에는 자전거용 램프, 전구용 쌍소켓, 건전지를 생산하는 소기업이었다.


안경 고쳐 쓰는 이건희 회장. 이건희 회장의 경영은 이병철 선대 회장의 경영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삼성그룹 제공>

안경 고쳐 쓰는 이건희 회장. 이건희 회장의 경영은 이병철 선대 회장의 경영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삼성그룹 제공>

195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 사회에 전기세탁기와 TV를 보급하면서 문명생활을 앞당겼다. 1932년 그는 종업원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의 사명은 물자를 끊임없이 만들어내 가난을 몰아내고 낙원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앞으로 250년간 목표를 달성하자."


마쓰시다의 특징은 경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인력 감축을 하지 않는다는 것(사망 이후 이 원칙은 깨짐)과 '유리창 경영'이었다. 유리창 경영이란 종업원에게 경영 실태를 모두 공개해 오해가 없게 만드는 투명 경영을 말한다. 2001년 매출은 일본 가전 랭킹 3위로 소니보다 약간 적은 6조8천767억엔(약 70조원)이었다. 소니와 마쓰시다, 이 두 회사는 삼성전자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당시에는 모두 기술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삼성중공업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일본 굴지의 재벌기업 미쓰비시 그룹의 계열사로, 1870년 이와사키 야타로가 세 척의 배로 시작해 조선, 가전, 항공기, 미사일, 보험, 맥주, 유리 등 전 분야에서 첨단 기술을 가진 기업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미쓰비시 그룹은 미쓰비시 중공업, 미쓰비시 전기, 메이지 생명, 도쿄해상화재보험, 기린 맥주, 아사히 유리, 미쓰비시 상사 등을 거느린 일본 2위의 재벌그룹으로, 미쓰이 그룹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당시 삼성중공업은 역사와 기술이 부족했기에, 앞선 기술과 경험을 가진 미쓰비시 중공업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다.


섬유 부문의 도레이는 제일모직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도레이는 1926년에 설립된 일본 최대의 화섬업체로, 나일론·폴리에스텔·합성수지·필름·케미칼을 생산했다. 화섬산업이 사양산업이 되면서 적자가 나자, 1987년 새로 취임한 마에다 가쓰노스케 사장은 도레이를 "당뇨병(대기업병)과 급성폐렴(적자)이 합병증을 일으킨 성인병 환자"로 진단했다. 그는 '글로벌 마인드'를 내세워 재건에 나섰고, 현재는 전 세계 82개국에 공장과 판매법인을 둔 글로벌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마에다 사장은 "인간이 옷을 입는 한 사양산업은 없다"고 주장하며 도레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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