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우리는 요하네스 케플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행성운동법칙을 발견한 위대한 천문학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황제의 궁정 점성술사였고, 귀족들의 운세를 봐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그토록 행성의 위치를 정확히 계산하려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더 정밀한 점성술 차트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를 '점성술사'가 아닌 '천문학자'로만 기억하는 걸까?
이건 단순한 호칭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 지식을 구성하는 방식의 문제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점성술과 천문학은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학문이었다. '천문학자'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적인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고대부터 순수한 과학정신을 가진 천문학자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역사를 재구성한다.
갈릴레오는 어떤가. 그는 종종 '종교의 탄압에 맞선 과학의 순교자'로 기억된다. 하지만 실제 갈릴레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자신의 딸을 수녀원에 보냈으며, 점성술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뉴턴은 또 어떤가. 우리는 그를 만유인력을 발견한 물리학의 선구자로 기억하지만, 정작 그는 연금술과 성경 해석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이런 선택적 기억은 우연이 아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진보적 서사'가 작동한 결과다. 이 서사에 따르면 인류는 미신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이성으로, 무지에서 계몽으로 끊임없이 진보해왔다. 과거는 극복해야 할 어둠이고, 현재는 그 어둠을 벗어난 빛이 되었다. 이런 프레임 속에서 과거의 복잡한 맥락들은 단순하고 일관된 이야기로 정리되어 버린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프레임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 교과서에 실린 내용, 상식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특정한 관점에서 편집되고 재구성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틀린 천동설을 주장한 사람'이 되고,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되며, 르네상스는 '인간성이 부활한 시기'가 된다.
비단 과학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이 이런 방식으로 구성되고 작동한다. 우리는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보면서도 그것이 세상 자체라고 믿는다. 과학과 종교를 대립시키거나, 이성과 감정을 대립시키며, 서양과 동양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프레임은 다 정치적인 구성물에 다름아니다. 최근 AI가 학습 데이터의 편향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예측들이 나오지만, 우리 인간의 지식이야말로 이런 편향된 데이터의 극단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지식이 거짓'이라는 허무주의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단지 '지식'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 그것이 특정한 시대와 권력 속에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케플러가 점성술사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왜 우리가 그 사실을 몰랐는지, 왜 알 필요가 없도록 편집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비판적 사고와 새로운 시대, 새로운 혁신의 시작이다. 한번 돌이켜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접하는 여러 사실들은 어떨까? 오늘 뉴스에서 말하는 '팩트'부터, SNS에서 보이는 여러 '정보'들, 이번 칼럼에서 필자가 소개하는 이야기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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