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 경북독립운동가의 길] 8. 17차례나 투옥된 ‘광야’의 민족시인, 이육사

  • 박관영·정만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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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1-17 19:10  |  발행일 2025-11-16
17회 투옥 겪은 불굴의 독립운동가
이육사.(경북 스토리텔링)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이육사(李陸史, 1904~1944) : 안동→대구→일본→중국 베이징→대구→중국 난징→서울→중국 베이징


안동 하계마을서 독립투쟁 보고 듣고 자라

열여섯에 대구 남산동으로 거처 옮긴 후에

대구독립만세운동 핵심 현장 가까이서 목격

조선은행 대구점 폭파시도·대구격문사건 등

독립운동과 연루된 사건 탓에 일제에 쫓겨

고문으로 죽을 때까지 시와 글로 독립 운동

이육사는 1904년 안동 도산면 원촌에서 태어났다. 원촌이 퇴계 묘소와 1㎞, 퇴계종택과 2㎞, 도산서원과 3.5㎞ 거리에 있는 것은 육사가 이황의 14대손이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도산서원 일원 하계마을은 독립지사를 25명이나 배출했다. 24명을 배출한 같은 안동의 오미리와 더불어 마을 단위 전국 최고 항일운동지로 평가받는다. 토계리 산55-5번지와 오미리 384번지 각각 '독립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연히 이육사는 어릴 때부터 독립지사들을 많이 보고, 또 활동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육사가 여섯 살이던 1910년, 이만도 선비가 일제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열다섯 살이던 1919년 만세운동 때는 이만도 선비의 며느리 김락이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실명했다.


안동 도산면 이육사 생가. 이육사는 1904년 안동 도산면 원촌에서 태어났다. 도산서원 일원 하계마을은 독립지사를 25명이나 배출했다. 마을 단위 전국 최고 항일운동지다

안동 도산면 이육사 생가. 이육사는 1904년 안동 도산면 원촌에서 태어났다. 도산서원 일원 하계마을은 독립지사를 25명이나 배출했다. 마을 단위 전국 최고 항일운동지다

육사의 가슴을 특히 후벼 판 사건이 1918년 1월과 2월에 일어났다.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 광복회의 실체 확인에 총력을 쏟던 일제 경찰이 마침내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을 체포했다.


소식을 들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중국 망명길에 안동을 찾아 광복회 회원 이동흠과 만났다. 이만도의 손자인 이동흠은, 파리장서운동을 펼친 이중업과 김락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이 향후 대책을 의논하는 중에 박상진의 경주 본가에서 '모친 위독' 기별이 뒤따라 왔다. 결국 박상진은 경주로 돌아갔다가 구속되고 말았다. 이 소식은 수많은 안동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들었고, 열네 살 육사에게도 커다란 안타까움이었다.


육사는 열여섯이던 1920년 대구로 옮겨왔다. 아미산 언덕 남산동 662번지가 주된 거주지였는데, 집에서 150m 북서쪽과 북동쪽에 남산교회와 동화사 포교당이 있었다. 그 두 곳은 모두 1919년 대구독립만세운동의 핵심 현장들이었다.


안동 도산면의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탄신 100주년이 되는 2004년 7월 그의 출생지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번지에 설립, 개관하였다. 민족시인 이육사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이 한곳에 모아져 있다.

안동 도산면의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탄신 100주년이 되는 2004년 7월 그의 출생지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번지에 설립, 개관하였다. 민족시인 이육사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이 한곳에 모아져 있다.

1919년 3월30일 덕산정시장 만세운동을 주도한 동화사 학승 10명이 대구형무소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투옥된 일, 그해 4월13일 남산교회 김태련 장로의 아들 김용해 지사가 대구 최초로 순국한 일 등을 육사가 알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뿐만 아니라 1921년 8월11일에는 광복회 박상진과 김한종 지사가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출생지 안동만큼이나 성장지 대구 또한 자연스레 육사에게 민족의식을 키워준 토양이 됐다.


당시 열일곱이던 육사는 '두 분의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할아버지 이중직은 1910년 "모두가 왜놈의 종이 됐는데 반상(班常)이 어디 있느냐"면서 가복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때부터 육사 집안은 가세가 기울었다.


스무 살이던 1923년 약전골목 김관제, 삼강병원 김현경, 경북도청 강신묵의 도움으로 유학을 간 일본 역시 육사에게 민족의식을 강고하게 심어준 땅이 됐다. 1924년 1월5일 일본 왕궁 정문 앞과 다리에 김지섭 지사가 폭탄을 던졌다.


자신들이 신성 시하며 '천황'으로 모시는 국왕을 향해 투탄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마흔 살이나 되는 김지섭 지사가 사형 언도를 받을 것이 너무나 자명한 일본 왕궁 투탄 거사를 자원 실행했다는 점에서, 또 그가 동향 안동의 오미리 출신이라는 점에서 육사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안동 이육사문학관 내부. 육사의 생애와 독립운동과 문학활동과 관련된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안동 이육사문학관 내부. 육사의 생애와 독립운동과 문학활동과 관련된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육사가 1년 남짓한 유학을 접고 1925년 1월 대구 남산동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 허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실행한 유학인데 왜 중도에 그만두었냐는 질책도 할 법했지만 그녀는 일언반구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허형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땅도 아니고 만주에서 영원히 눈을 감으셨어.'


13도 의병연합군 제2대 총사령관으로 활동한 허위 재종숙도 1908년에 이미 순국했다. 허위 재종숙의 작은형인 허겸, 친오빠 허발과 허규, 작은할아버지 허필은 망명지 서간도에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 중이었다. 그녀는 아들 육사가 아직 무탈하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었다. 일본보다는 대구가 훨씬 안전하지 않겠나 싶었다.


그녀의 기대와 달리 대구는 그저 험지일 뿐이었다. 육사는 귀국 후 친형 이원기, 친동생 이원일, 장진홍, 이정기, 조재만 등과 합세해 의열단 대구지부 성격을 띤 암살단을 조직했다. 이 일이 큰 화근이 됐다.


중국 베이징 대학에 다니다 1927년 여름 대구로 돌아온 이육사는 이내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시도한 장진홍 의거가 터졌는데, 수사가 미진하자 일제 경찰은 이육사 등 평소 불령선인으로 분류해온 8명을 범인으로 조작했다. 이들은 장진홍이 1929년 2월 일본에서 붙잡힐 때까지 줄곧 고문과 옥살이로 고통 받았다.


이육사는 1931년 1월21일 '대구격문사건'과 연루돼 또 다시 고문을 당했다. 육사는 이듬해 10월 난징으로 가서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했다. 이곳은 의열단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군사간부학교였다.


귀국해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육사는 1934년 3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또 고문을 당했다. 중국과 대구를 오가는 강행군에 지친 이육사에게 거듭되는 고문과 투옥은 참담한 고난이었다.


엎친 데 덮쳐 폐결핵까지 왔다. 1936년 포항 송도원과 경주 남산 옥룡암에서 요양을 했다. 그 사이 '청포도' 등의 시를 썼다.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북돋운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한" 결과였다(국가보훈부 '이달의 독립운동가').


짧은 생애 중 열일곱차례나 투옥됐던 육사는 우리 정신사의 대표 지성인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안동 이육사문학관 이육사흉상과 절정 시비.

짧은 생애 중 열일곱차례나 투옥됐던 육사는 우리 정신사의 대표 지성인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안동 이육사문학관 이육사흉상과 '절정' 시비.

병은 차도가 없었다. 1941년 성모병원에 입원했고, 또 다시 옥룡암 요양 생활이 재개됐다. 그런데도 그는 설날인 1943년 2월 5일 절친 시벗 신석초에게 베이징에 가겠다 했고, 대구격문사건 때 함께 옥고를 치른 이선장에게도 충칭과 옌안 방문 후 무기를 들여오겠다고 밝혔다.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이육사에게 가족 소식이 왔다. 장진홍 의거 때 당한 끔찍한 고문으로 불구의 몸이 됐던 형 이원기의 하세 1주기를 맞아 7월13일 소상이 치러진다는 기별이었다. 장남보다 한 달가량 앞서(6월12일) 세상을 뜬 어머니의 소상에 대한 전언도 함께 왔다.


안동에 왔다가 돌아가던 이육사는 서울에서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됐다. 생애 17번째로 투옥된 이육사는 그로부터 약 6개월 동안 일제의 끈질기고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던 중 끝내 1944년 1월16일, 이육사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육사는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60년 고향 원촌마을 뒷산으로 이장됐다. 1946년 10월20일 육사가 살아서 못 펴낸 시집이 발간됐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했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의 시 청포도는 희망을 노래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우면서 호방하다. 사진은 안동 이육사 청포도시비.

육사의 시 '청포도'는 희망을 노래하면서도 슬프고 아름다우면서 호방하다. 사진은 안동 이육사 청포도시비.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호방한 시는 한국문학사에 다시 없다. 이토록 희망을 노래하면서도 슬픈 시 역시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이육사는 시인으로만 기억돼서는 안 된다. '민족시인'이라는 더욱 가치 있는 호칭으로 섬길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이육사의 삶에 대한 온당한 예의가 못 된다.


이육사는 짧은 생애 중 무려 17회나 투옥을 겪은 불굴의 독립운동가이다. 언행일치를 최고덕목으로 여겼던 전통사회의 가치관을 완벽하게 재현해준 우리 정신사의 지성인이다. '이육사=시인'이 아니라 '이육사=독립지사, 민족시인'이다.


우리는 모두 나라와 민족의 천년 뒤를 위해 작은 노래의 씨앗을 뿌리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이육사에 대한 예의다.


글=정만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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