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홍(張鎭弘, 1895∼1930) : 구미→러시아→대구→안동→영천→일본→대구
청일전쟁 일어난 해 칠곡 인동면에서 태어나
민족지사에게 배우며 독립 향한 열망 싹틔워
광복회 가입했으나 활동 제대로 못 한 채 와해
폭탄제조법 배워 대구경북 거점 네 곳에 설치
이후 일본서도 여러 거사 준비했으나 체포되고
조선인 친일경찰에게 붙잡혀 법정서 사형선고
피체일 각기 다른 보훈기록…정리·다듬어야
장진홍은 1895년 6월6일 칠곡군 인동면 문림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은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해였다.
1905년 장진홍은 열 살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을사늑약이 체결돼 우리나라는 외교권을 빼앗겼다. 민영환·홍범식 등 많은 지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에 충격을 줬다.
1895년은 장진홍이 출생한 해였으니 그에게 직접 영향을 끼친 사건은 없었다. 하지만 1905년은 달랐다. 망국 직전의 혼란한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교육운동이 필수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기독교계에서도 선교를 겸해 학교를 열었다.
문림리에서 그리 멀지 않아 아이들도 충분히 걸어 왕복할 수 있는 읍내면 구제동(지금의 진평동)에 학교가 개교했다. 1901년 출범한 구제동 교회가 부설 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인명학교(仁明學校)였다.
인명학교에서 장진홍은 두 살 위 이내성, 두 살 아래 임봉선과 함께 공부했다. 이내성은 구제동 교회 창립 핵심 중 한 사람인 이성률의 아들이다. 임봉선은 브루엔 선교사가 초가 3동 10칸의 구제동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도운 최고 열성 신자 중 한 사람인 임공첨의 딸이었다.
1901년 출범한 구제동 교회가 부설 교육기관으로 설립한 인명학교(仁明學校). 지금은 강동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이 곳에서 장진홍은 두 살 위 이내성, 두 살 아래 임봉선과 함께 공부했다.
임공첨은 인명학교 교장이었다. 그와 함께 인명학교를 주도한 사람이 장지필 교사였다. 구한말 최대 계몽운동단체였던 대한협회의 칠곡지회 창립을 이끈 장지필은 국채보상운동 고령군 대표로 활동한 독립유공자 이두훈의 내산서당에서 김상덕(반민특위 위원장), 남형우(임시정부 법무총장) 등과 함께 투철한 민족정신을 체화한 교육자였다.
장지필은 학생들에게 역사·민족·향토와 관련되는 이야기를 전했다. "우리 학교에서 동쪽으로 10리(4㎞) 거리에 있는 천생산은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왜병들과 맞섰던 곳이다. 서쪽으로 40리(16㎞) 거리에 우뚝 솟아있는 금오산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와 선산부사 배설 장군이 산성을 쌓아 왜적들을 막아내었던 곳이다."
장지필의 훈화는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주제를 에둘러 담고 있었다. 장지필, 이내성, 임봉선은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했다.
장지필은 종종 "제자가 자신보다 뛰어나 '청출어람'이라는 세평을 얻을 때 스승은 삶의 보람을 느낀다"라고 했다. 또 공자가 말한 네 가지 사람 유형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했다. "태어나면서 저절로 아는 사람이 최상, 배워서 아는 사람이 차상, 필요해서 배우는 사람은 그 아래, 필요해도 배우지 않는 자는 최하이다." "최상의 인재가 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다. 배워서 아는 차상은 돼야 한다. 그리고 학이시습(學而時習)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배운(學) 것을 실천하는(習) 기쁨은 언행일치의 선비정신을 가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1917년 이내성도 장진홍에게 그 말을 했다. 당시 장진홍은 조선 보병대 복무를 마친 뒤 새로운 진로를 모색 중이었다. 이내성은 "인명학교에서 배우고 사회생활을 통해서도 배웠다. 우리 민족이 이토록 힘들게 사는 근본 원인은 국권을 빼앗긴 데 있다. 일본놈들을 몰아내는 의혈 투쟁에 목숨을 바치자"면서 광복회 가입을 제안했다. 장진홍은 즉각 광복회에 가입했다.
하지만 장진홍은 광복회 활동을 본격 펼쳐보지 못한 채 1918년 4월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갔다. 친일파 장승원 처단과 일본 헌병소 습격 등으로 이름을 떨치던 광복회가 1918년 1월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2월 총사령 박상진 피체 이후 사실상 와해 수순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바롭스크에서 장진홍은 한인사회당의 적위대 군사교관으로 활동했다. 한국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 창당된 것은 러시아 혁명 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혁명세력인 백위대가 하바롭스크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적위대가 해산되고 교육도 중단됐다.
장진홍이 귀국한 후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내성과 임봉선은 구속됐고, 장진홍은 한국인을 죽인 일본의 만행을 서방세계에 고발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923년 임봉선이 죽었다. 대구 신명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이끌다가 1년여 고문을 겪었는데, 그 후유증으로 결국 순국한 것이었다.
충격으로 한동안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던 장진홍은 1926년 1월 의열 독립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이내성과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깊은 토론을 했고, 1927년 4월 호리키리 시게사부로에게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칠곡 왜관읍의 애국동산에는 옥중에서 순국한 장진홍 선생을 비롯해 애국지사를 기리는 19기의 기념비가 있다. 사진은 장진홍선생기념비.
장진홍은 10월16일 불을 붙여놓으면 20∼30분 뒤 터지는 대형 폭탄 4개와 자살용 소형 폭탄 1개를 만들었다. 18일 오전 9시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 대구경찰서, 경북도청을 목표로 정한 장진홍은 그 네 곳 인근의 덕흥여관에 투숙객인 양 들어갔다. 오전 11시쯤 그는 종업원 박노선에게 벌꿀 선물상자처럼 꾸민 폭탄 넷을 주면서 배달을 부탁했다.
박노선은 조선은행 대구지점부터 찾아갔다. 포병 중위 출신 요시무라 게츠가 화약 냄새를 맡고 황급히 상자를 열어 타들어가고 있는 도화선을 끊었다. 나머지 상자 셋은 밖으로 옮겨졌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차례차례 폭탄이 터졌다. 은행 현관문이 부서지고, 창문 70여 개가 파편이 돼 대구역까지 날아가고,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장진홍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대구지점, 대구경찰서, 경북도청에 선물상자로 위장한 폭탄을 설치했다. 터진 폭탄의 굉음은 천지를 놀라게 했고 독립의 함성이었다. 사진은 칠곡 장진홍선생기념비.
'천지를 놀라게 한 굉음'은 '한민족에게 독립의 함성'이었고, '민족혼을 일깨운 우레소리'였다(국가보훈부, '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 경찰은 1천600여 명을 투입해 대대적 수사에 들어갔다.
몸을 피한 장진홍은 안동경찰서, 영천경찰서, 영천 친일부호 이인석의 집 등을 목표로 2차 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투탄을 맡을 동지가 병사하는 등 여러 변수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못했다.
일제 경찰의 수사망은 점점 좁혀졌다. 체포 직전의 위기에 놓인 이내성이 1927년 12월13일 구미에서 자결했다. 장진홍은 1928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제국의회의 상원에 해당하는 귀족원, 그리고 도쿄 관할 경찰의 총본부 경시청에 폭탄을 던진 다음 러시아로 탈출할 계획이었다.
장진홍은 도쿄와 바로 붙은 사이타마, 사이타마 바로 북쪽의 이바라키, 이바라키 바로 북쪽의 후쿠시마 등지를 배회하면서 폭탄 구입과 동지 규합에 골몰했다. 도움 될 기미가 엿보인다 싶으면 훗카이도 바로 아래의 아오모리까지도 갔다.
마지막으로 오사카에 도착했다. 오사카는 동생 장의환이 안경점을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는 사이, 경북경찰서 고등과는 장진홍이 주모자라는 점과 오사카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남학봉 등 3명의 경찰을 거느린 조선인 경부이자 악질 친일경찰의 대명사인 최석현이 대한해협을 건넜다. 오사카에서는 현지 한국인 노동자 이춘득과 남주희가 밀정이 돼 최석현을 도왔다. 결국 장진홍은 일본 현지 경찰의 협조까지 얻어 은신처를 포위한 최석현 일당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조선인 친일경찰에 붙잡힌 장진홍은 사형 선고를 받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장진홍은 일제에게 죽임을 당할 수 없다는 각오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은 칠곡 장진홍선생기념비.
1930년 2월17일 대구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장진홍 지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24일 복심법원 사형 선고에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7월21일 고등법원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됐다. 장진홍은 일제에게 죽임을 당할 수 없다는 각오로 7월31일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 장진홍의 시신은 일제의 통제 때문에 친족과 동지들이 지켜보지도 못하는 채 칠곡 석적면 남율언덕에 나무토막처럼 파묻혔다.
1945년 8월15일까지 15년 동안, 무덤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머리를 숙였다. 2023년 12월12일 의거 현장에 흉상이 세워졌다. 그 앞을 지날 때 장진홍 지사를 다시 한번 상기할 줄 아는 민족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사례를 하나만 들어본다. 장진홍 지사 피체일이 국가보훈부 공훈록에는 2월13일,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인명사전에는 2월14일, 국가보훈부 '이달의 독립운동가'에는 2월18일로 기록돼 있다.
글=정만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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