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근교 가마쿠라의 자택에서 대화를 나누는 오카다상. 한국의 어려운 아동을 돌보기 위해 대구에 집을 마련하고 7년간 도쿄와 대구를 오가며 헌신했던 그는 지금도 손수 정리한 자료와 연구를 한국과 일본에 남기고자 하루 대부분을 책상 앞에서 보낸다.<임 원장 제공>
10여년전 일본인이 도쿄에서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퇴직금으로 대구에 집을 사서 어려운 한국 아이들을 돌본다는 소문을 듣고 만났다.
오카다상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전, 당시로서는 드물게 영어도 잘하는 유능한 직장인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회사가 군수 공장으로 바뀌자 그런 곳은 다닐 수가 없다고 그만두었다. 전시에 직장을 그만둠은 궁핍이었다. 오카다상이 기억하는 아버지 가르침은 "삶의 가치를 어디 두느냐가 중요하고, 가난해도 나누면 아름답게 살 수 있다"였다.
오카다상이 대학에 입학한 1960년 대는 일본에서 안보 투쟁이 격렬했다. 물려받은 기질 인지 시위에 참여했다가 대학 2학년 때 제적되었다. 잠시 노동현장에서 일하다가 복지사 자격을 얻어서 도쿄도청 장애인 복지 부서에서 일하면서 평생 직업이 되었다.
당시 일본행정을 배우러 한국에서 많은 전문가들이 도쿄도 복지 시설을 방문했다. 오카다상은 연수 온 한국인들과 교류하면서 도움을 주었다. 또한 자신도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일하면서 대학에 편입하였고, 그 후 대학원(쓰쿠바 대학)에 진학하여 장애에 대해 공부하고 시즈오카 현립대학에서 7년간 강의를 했다.
오카다상이 도쿄공무원을 퇴직하자 한국에서 많은 요청이 있었다. 인연이 있던 한국 지인들 권유로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대학에서 강의도 맡게 되었다.
한국생활에 익숙하자 오카다 눈에는 한국의 불쌍한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을 따뜻하게 보는 본능이었다. 이혼하는 부부들이 늘어나면서 냉대받는 아이들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새 부모가 들어오면서 생기는 아이들 문제가 한번씩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학대받은 아이들 몸과 마음이 망가져도 돌볼 시설이 없었다. 대안가정이란 형태는 시설을 갖추면 인건비는 정부가 보조하는 형태가 생겼다. 이에 오카다는 자기 퇴직금을 털어서 대구에 거주 공간을 마련했다. 자기의 전 재산이었다. 실제로 운영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오카다상은 늙은 몸으로 도쿄, 대구를 한달씩 오가는 생활을 7년간 이어갔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진 아이들을 오카다상은 지극 정성으로 보듬었다.
그러면서 오카다상은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들 모임도 만들었다. 대구에는 그런 일본인 여성이 100명 이상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 모임을 가질 생각을 못했었다. 일본 여성들은 한국 사회에서는 역시 소수자였고 차별을 받았다. 나이가 든 오카다상을 중심으로 일본인 여성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정기적인 모임을 주도하고 합창단(이코이)을 만들어 발표회도 열었다.
그렇게 활발히 활동하다가 몇 년 전 연세 때문에 일본으로 귀국하셨다. 지금 오카다상은 움직임이 둔해졌다. 양쪽 무릎 수술도 했고, 노쇠의 징후가 뚜렷하다. 지금도 여전히 지금까지의 자료를 정리하여 일본과 한국에 남기려 분투하는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이다. 최근에도 장애에 관한 책을 냈다.
나는 도쿄 시내에서 오카다상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집은 가마쿠라여서 대학까지 1시간이 걸린다. 도쿄에 머무는 동안 이제는 내가 챙기고 싶었다. 혼자 외로울 것 같아서 아침, 저녁은 같이 먹으려고 노력한다. 준비한 음식을 먹고 저녁에는 일본 사회의 궁금한 것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자료 찾는 것 도움을 청하고 토론을 하면 오카다상은 눈이 빛나고 목소리에 힘이 생긴다. 도서관을 찾아 가고자 하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꼭 안내를 한다. 나도 기숙사보다 집 같은 느낌으로 푸근함을 느낀다.
새벽 2시까지 책상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거실에서 공부하게 된다.
오카다상이 늙어가는 것을 보면 안쓰럽다. 가족, 동포 이상의 연대감을 느낀다.
임재양(임재양외과 의원장, 게이오대학 법정대학 방문연구원)
강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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