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정재걸의 오래된 미래교육…비유의 불가피성

  • 정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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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2-02 11:12  |  발행일 2026-02-02
비유의 불가피성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내가 3주 간격으로 쓰는 칼럼에 대해 어느 지인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와 같다고 비판했다.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묻자 '우리는 분리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물속에서 서로 연결된 섬과 같다', '우리는 영상이 아니라 스크린이다' 혹은 '보는 자는 볼 수 없다' '죽음은 없다' 등의 주장이 그런 것이라고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썼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아마 그 지인은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이미 그 침묵을 깨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말로 포착될 수 없지만, 그 '불가언성(不可言性)'을 언급하지 않고는 진리를 향한 사유가 시작될 수 없다. 이 역설에서 바로 비유가 등장할 자리가 마련된다. 비유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직접 서술하지 않고 다른 것을 통해 그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서 진리를 암시한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진리를 '태양'에 비유하고, 부처가 깨달음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설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리는 태양처럼 눈이 부셔서 직접 보면 눈이 멀고, 손가락처럼 언어는 단지 그것을 가리킬 뿐이다. 진리를 가리키는 모든 언어는 이처럼 비유의 구조를 가진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말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며 인간은 언제나 '다른 무엇'을 통해서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 하였다. 말로 표현되는 도는 이미 참된 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노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5천여자의 말을 통해 그 도를 말하려 했다. 이 모순의 해소가 바로 비유의 방식이었다. 노자는 도를 '물'로, '어머니'로 또는 '깊은 계곡'으로 비유함으로써, 개념이 아닌 상징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려 했다.


예수 또한 진리를 비유로 말했다. 하늘나라는 씨 뿌리는 자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씨앗과 같고, 겨자씨처럼 작지만 크게 자란다고 했다. 그 이유를 제자들이 묻자, 예수는 '천국의 비밀은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했다. 진리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비유는 이해하는 자에게만 열리는 언어, 즉 진리의 '암호'다.


불교의 경전에서도 이와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법화경'의 '삼거화유(三車火喩)' 불타는 집에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세 가지 수레를 미끼로 제시하는 비유는 진리의 방편(方便)을 상징한다. 진리는 직접 제시되면 사람을 압도하거나 오해를 불러오기에 비유와 상징의 옷을 입고 다가온다. 불교 경전의 모든 구절은 진리가 아니라 방편이다. 이렇듯 비유는 단순한 설명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부드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자비의 언어다.


철학 역시 비유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사유하면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말했다.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드러남(aletheia)이므로 그것을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빛'과 '숲길' 같은 시적 이미지로 존재의 경험을 설명했다. 진리는 논리의 대상이 아니라, 비유적 사유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칸트 또한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이 물자체(ding an sich)를 알 수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현상, 즉 감각과 인식의 틀 안에 드러난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의 언어는 과학의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과학이 정량적 서술을 통해 현상을 설명한다면, 철학은 비유를 통해 현상 너머의 진리를 암시한다.


우리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구분과 대립의 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궁극적 진리는 분리 이전의 통합된 전체다. 또한 언어는 주어와 술어를 구분한다. 물이 흐른다는 말은 물과 흐르는 것을 분리한다. 이러한 언어의 구조로는 진리를 담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우파니샤드 중 하나인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에서는 궁극적 진리는 어떠한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네티 네티(Neti Neti)'만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네티, 네티'는 '~이 아니다', '~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오직 부정하는 말만이 진리에 부합한다고 설명한다.


비유는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자 동시에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의 지표다. 비유는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하지 않고, '진리는 이와 같다'고 말한다. 그 차이는 절대적이다. 전자는 교조이고, 후자는 깨달음이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조심하라. 그는 곧 '나는 진리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결코 소유되거나 규정될 수 없으며 오직 비유 속에서 열린 채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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