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중>

  •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 |
  • 입력 2026-02-13 06:00  |  발행일 2026-02-13
바슈차르시야 중앙광장과 세빌 분수. 바슈차르시야 지역을 대표하는 장소다.

바슈차르시야 중앙광장과 세빌 분수. 바슈차르시야 지역을 대표하는 장소다.

국립 대학도서관에 북서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사라예보 구시가지(Stari Grad)가 나온다. 동서양 문화가 만나는 사라예보의 본색을 이 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의 이국적인 건축물이 눈길을 사로잡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각종 가게와 기념품점이 바자르(시장)와 어우러져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슬람 모스크와 함께 가톨릭 성당, 정교회 교회, 유대교 회당 등 다양한 종교 시설이 공존하는 '종교의 용광로'라는 점이다. 이 일대를 '바슈차르시야' 지역이라 부른다. '중앙 시장'이라는 뜻이다.


바슈차르시야 중앙광장과 세빌 분수, 오른쪽에 바슈차르시야 모스크의 미나렛이 솟아 있다.

바슈차르시야 중앙광장과 세빌 분수, 오른쪽에 바슈차르시야 모스크의 미나렛이 솟아 있다.

바슈차르시야 지역을 대표하는 장소는 15세기에 형성된 튀르키예식 광장이다. 광장 중앙엔 세빌(Sebilj)이라고 불리는 오스만 양식의 목조 분수가 서 있다. 1753년에 지어진 이 분수는 시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지금은 도시의 상징이자 만남의 장소로서 늘 인파로 북적인다. 이 광장에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이 비둘기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비둘기에 뒤섞여 분수의 물을 마시는 사람도 많이 보인다. 이 물을 마시면 사라예보에 다시 오게 된다는 전설 때문이다. 광장 너머 바슈차르시야 모스크의 돔과 미나렛이 우뚝하게 서 있다. 16세기 초반에 건설된 역사적인 모스크로, 오스만제국 시대의 건축 양식과 문화를 잘 보여주는 명소이다. 모스크 주변으로 구리 공예품을 만드는 카잔쥘룩 거리와 전통 시장이 형성돼 있어, 종교 건축과 일상생활이 공존하는 독특한 풍경을 이룬다.


바슈차르시야 모스크 인근 구리 공예품을 만드는 카잔쥘룩 거리.

바슈차르시야 모스크 인근 구리 공예품을 만드는 카잔쥘룩 거리.

이 지역은 또 튀르키예식 구시가지로 불린다. 16세기 초 오스만제국의 보스니아 총독 가지(Gazi) 후스레브-베이(Husrev-bey)가 오스만 양식으로 건설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Gazi'는 오스만제국의 특별 존칭이며, 'bey'는 총독 같은 직함이다. 그는 보스니아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사라예보의 도시 발전과 현대적인 기반 시설 구축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수많은 건물의 건설을 지시하고 자금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재산을 종교 및 교육시설 건설 기금으로 기증했다. 그는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한 마드라사(현 가지 후스레브-베이 기술학교)와 초등교육 기관인 메크테브도 설립했다. 특히 1537년에 설립된 마드라사는 보스니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받는다. 이 외에도 모스크 단지 내에 보스니아에서 가장 큰 가지 후스레브-베이 도서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가지 후스레브-베이가 만든 지붕 있는 시장 베지스탄.

가지 후스레브-베이가 만든 지붕 있는 시장 '베지스탄'.

시민들의 생활과 경제 방면에도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수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40여 개의 공공 분수를 설치해 주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했다. 공중목욕탕 '함맘'(현 보스니아연구소 건물), 무료 급식소 '이마렛' 등의 생활편의시설도 설치했다. 특히 경제 활성화를 위해 시장 건물 베지스탄(Bezistan)과 대상(隊商, Caravan)들의 숙소인 카라반사라이(Caravanserai)를 건설했다. 베지스탄은 지금의 '가지 후스레브-베이 시장'이며, 카라반사라이는 '모리차 한'과 '타슐리한'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모리차 한은 현재 레스토랑과 카페 등 상점으로 활용되고 있고, 사라예보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타슐리한은 1879년 사라예보 대화재로 완전히 파괴돼 그 흔적만 남았다. 카라반사라이는 오스만제국 시절 대외교역의 활성화를 상징하는 곳으로서,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머물며 교역하던 장소였다. 중국 베이징의 사합원처럼 'ㅁ'자 형태였는데, 방어에 용이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2층 구조로서 1층은 낙타와 말, 물품 등을 보관하는 창고였고, 2층은 숙소로 사용했다.


가장 큰 규모의 카라반사라이 타슐리한 유적. 1879년 사라예보 대화재로 완전히 파괴돼 흔적만 남아 있다.

가장 큰 규모의 카라반사라이 '타슐리한' 유적. 1879년 사라예보 대화재로 완전히 파괴돼 흔적만 남아 있다.

가지 후스레브-베이의 가장 존경스러운 점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종교적, 자선적 목적으로 기부하는 이슬람식 기금 제도 '와크프(Waqf)'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제도 덕분에 도시의 종교나 공공시설이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사라예보가 16세기에 급격히 발전해 발칸반도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 것은 상당 부분 그 덕분이며, 오늘날에도 그의 유산은 사라예보 구시가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바쳐 지은 '가지 후스레브-베이 모스크' 정원에 묻혔다. 1531년에 완공된 이 모스크는 사라예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슬람 건축물이자 발칸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오스만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26m 높이의 초록색 돔과 45m 높이의 뾰족한 미나렛(첨탑)으로 시내 어디에서든 보인다. 멀지 않은 곳에 페르하디야 모스크도 있다. 북적북적한 관광지 중간에 있는 이 모스크 앞엔 작은 이슬람 묘지가 있다. 또 라틴 다리를 건너면 황제 모스크도 있다. 1457년 오스만제국이 도시를 건설할 때 함께 건립한 사라예보 최초의 모스크이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술탄 마호메트 2세에게 헌정돼 '황제(술탄) 모스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가지 후스레브-베이가 묻혀 있는 가지 후스레브-베이 모스크.

가지 후스레브-베이가 묻혀 있는 '가지 후스레브-베이 모스크'.

모스크만 있는 게 아니다. 황제 모스크 아래쪽에는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 성당'이 있다. 이곳에는 원래 1853년에 건립된 사라예보 최초의 가톨릭 성당이 있었지만 1879년 사라예보 대화재 때 불타버렸다. 이 성당은 20세기 초에 새롭게 건축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무슬림이나 정교회 신자들도 즐겨 찾는 곳으로, 종교 간 평화와 공존을 상징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황제 모스크 아래쪽에 있는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 성당. 20세기 초에 새롭게 건축한 것이다.

황제 모스크 아래쪽에 있는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 성당'. 20세기 초에 새롭게 건축한 것이다.

바슈차르시야 지역에도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성 미카엘 가브리엘 대천사 성당이 있다. 16세기에 건설된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인데, 19세기에 건설된 세르비아 정교 성당과 구별하기 위해 '구 세르비아 성당(Stara srpska crka)'으로 불린다. 이 오래된 정교 성당은 세르비아-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돼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매우 소박해서 잘 눈에 띄진 않는다.


가까이에 또 지나쳐서는 안 될 장소가 하나 있다. 유대인 박물관이다. 원래 이 건물은 16세기 말에 건설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오래된 시나고그(Synagogue), 즉 유대교 회당이다. 15세기 무렵부터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 유입된 유대인들이 매우 많아서 한때 사라예보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상당수가 살해당했고, 생존자들은 거의 다 이스라엘로 이주해서 지금은 유대인들이 많지 않다고 한다. 이 박물관에는 유대인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고난과 제노사이드의 아픔을 상세히 전시하고 있다.


바슈차르시야 모스크. 16세기 초반에 건설된 모스크로 오스만제국 시대의 건축 양식과 문화를 잘 보여준다.

바슈차르시야 모스크. 16세기 초반에 건설된 모스크로 오스만제국 시대의 건축 양식과 문화를 잘 보여준다.

사라예보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는 '유럽의 예루살렘'으로 불린다. 하지만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된 이후, 동방정교 세르비아계는 세르비아로, 가톨릭 크로아티아계는 크로아티아로 대부분 이주했다. 유고슬라비아 시절 다양하게 섞여서 공존하던 종교와 민족이 신생 독립 국가들의 국경에 따라 나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이슬람교도, 동방정교도, 가톨릭교도가 각각 30% 정도씩 점하고, 유대인들도 꽤 많았지만 현재는 이슬람이 압도적 다수이며, 가톨릭과 정교회는 2~3%에 불과하다. 특별한 종교 활동을 안 하던 이슬람교도들도 전쟁 이후 독실한 신자가 되면서 최근 모스크도 많이 생겼다. 현재 사라예보에는 200개 이상의 모스크가 있다.


하지만 역사에서 비롯된 종교적 톨레랑스(Tolerance)는 여전하다. 이슬람교도가 압도적 대다수가 된 지금도 정교와 가톨릭의 종교적 축일을 모두 공휴일로 지정해놓고 있다. 사라예보의 시민들도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다른 모든 종교 행사에 스스럼없이 참석한다. 사라예보에선 모스크에서 흘러나오는 기도 소리가 유난히 작으며, 성당의 종소리도 크지 않다고 한다. 다름을 존중하며 공존하는 지혜인 것 같다.


내전 기간에 시민들의 생명수였던 사라예보 양조장(Sarajevska Pivara).

내전 기간에 시민들의 생명수였던 사라예보 양조장(Sarajevska Pivara).

사라예보 양조장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 피브니차 HS. 보헤미안 스타일의 술집이다.

사라예보 양조장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 '피브니차 HS'. 보헤미안 스타일의 술집이다.

어둠이 깔리면서 이야기는 다시 황제 모스크 근처의 맥주집으로 이어졌다. 1864년부터 이어져 온 사라예보 양조장(Sarajevska Pivara)에서 운영하는 '피브니차 HS(Pivnica HS)'이다.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술집인데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신선한 '사라예브스코(Sarajevsko)' 브랜드가 있는 집이다. 맥주에 곁들인 이 양조장의 이야기는 쓰리면서도 찡하다. 맥주를 만드는 물이 보스니아 내전 중에 시민들의 생명수였다는 이야기이다. 4년간 도시 전체가 포위돼 상수도 시설이 끊겼을 때, 시민들은 이 양조장의 지하수로 버티었다. 시민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매일 이곳으로 모여들었으며, 상징적인 양이긴 했으나 맥주 생산도 계속됐다. 하지만 적들의 포탄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물을 받으려고 줄을 서 있던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의 마지막 심장처럼 그래도 양조장은 멈추지 않았다. 내전 시기 이곳은 시민들의 희망이자 불굴의 정신을 상징했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이야기 안주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