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근대 건축, 중구를 거닐다] <5> 무영당

  • 박준상·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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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3-15 08:09  |  발행일 2026-03-15
일본 자본 맞서 조선인이 설립한 대구 3대 백화점
박태준·윤복진·이인성 등 예술인 ‘사랑방’ 역할도
이근무가 대구 첫 민족자본으로 문을 연 백화점인 무영당. 당시 보기 드문 미국식 빌딩 개념으로 대형화된 5층 규모의 타일로 마감된 건물이다.

이근무가 대구 첫 민족자본으로 문을 연 백화점인 무영당. 당시 보기 드문 미국식 빌딩 개념으로 대형화된 5층 규모의 타일로 마감된 건물이다.

"경성의 백화점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1933년 여름, 개성상인 출신 이근무(李根茂)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당시 그는 대구에서 서점(문구점) 무영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이근무는 대구에 자신의 백화점을 차리는 것이 꿈이었다. 이날도 경성의 백화점을 둘러본 후였다.


이근무는 백화점을 "최신 유행의 표본실"이자 "지갑이 쉬 열리는 곳"이라면서 부러워했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경성을 수차례 드나들었고 마침내 1937년 '무영당 백화점'을 설립했다. 부산, 평양, 개성, 목포, 군산 등 다른 지방 도시에도 속속 백화점이 들어서던 시기였다. 대구부 본정(지금의 대구 중구 서문로 1가 58)에 문을 연 백화점 무영당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세운 이비시야백화점과 미나카이백화점과 함께 대구 3대 백화점으로 꼽혔다. 일제강점기 일본 자본에 맞서 대구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건립된 백화점이기도 했다. 백화점 2층에 마련한 전시장에서는 전시회나 음악회 등이 개최돼 작곡가 박태준·화가 이인성·동요 시인 윤복진 등 지역의 신지식인과 예술인들이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청년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서점에서 출발해 취급품을 늘려나가며 백화점이 된 무영당은 조선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2층의 전시장에는 전람회와 발표회가 끊이지 않았고, 그 명맥을 지금까지도 잇고 있다.

서점에서 출발해 취급품을 늘려나가며 백화점이 된 무영당은 조선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2층의 전시장에는 전람회와 발표회가 끊이지 않았고, 그 명맥을 지금까지도 잇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설립한 대구의 백화점


대구 최초의 백화점은 1932년 중구 동성로 1가에 세워진 이비시야였다. 당시로서는 초고층인 4층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었다.


2년 뒤 1934년 가장 높고 시설이 좋은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이 들어선다. 일찍이 대구로 진출해 서문로 근처에서 잡화상 등으로 돈을 벌었던 일본인 상인 4명이 공동 출자해 만든 미나까이는 북성로 동쪽 초입에 있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규모로, 놀랍게도 당시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대구의 명소이기도 했다. 대구역전과 북성로, 향촌동, 태평로 등 당시 대구 1급 상권의 코어에 위치해 있어 노다지를 캘 수 있었다. 외벽은 흰색 타일로 마감을 했다. 정면에는 모두 30개의 장방형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4층 창문 위에는 꽃잎 모양의 장식판을 달았다. 2층부터는 목재 마루판을 깔았다. 벽은 시멘트 몰타르로 마감했고 건물 지하에는 보일러실, 정화조, 옥상에는 물탱크와 피뢰침도 설치했다.


백화점 내에는 서적부도 있었고 맨 위층에는 스카이 카페도 경영했다. 정면 주 출입구 옆에는 쇼윈도를 설치하기도 했다. 미나까이는 서울에서 시작해 대구로 내려온 백화점이 아니었다. 당시 서울에 맞먹을 정도의 큰 상권을 가졌던 대구를 기반으로 해서 서울로 치고 올라갔다. 서울 충장로, 부산 시청 옆에도 지방 분점을 연이어 내기도 했다. 나중엔 서울로 본사를 옮기고 만주까지 진출했다. 급기야 일본 도쿄와 교토로도 사세를 확장했다.


광복 후 이비시야 백화점은 대구시에서 인수해 숙소로 사용됐다. 1950년 6·25전쟁 이후 헌병대 사령부로 활용됐다. 1960년대 들어서는 여러 차례 매각되면서 리모델링을 했고 건물의 원형을 상실했다.


미나까이 백화점도 광복 후에 미군에 이어 한국군이 인수했고 미국공보관도 잠시 입주해 있었다. 1969년 4월 국유재산으로 환수돼 서대구 세무소로 사용됐다. 이후 부지와 건물이 대우그룹에 매각되었고, 1984년 10월 건물은 철거됐다.


◆무영당, 서점에서 대구 3대 백화점으로


일제강점기 이비시야와 미나까이 백화점과 함께 대구의 3대 백화점으로 꼽힌 백화점이 무영당이다.


무영당 1923년 서점(문구점)으로 출발했다. 서적과 문구류를 중심으로 취급하다 점점 취급품을 늘리기 시작했다. 도서, 잡지부, 문방구부, 운동구부, 액연회구부(額椽繪具部), 양품잡화부(洋品雜貨部), 악기부 등 취급 품목과 규모가 확대됐다.


창립자는 이근무였다. 그는 고추씨 세말을 들고 대구에 내려와 거상이 된 개성 사람이었다. 개성상인 출신답게 친절함과 신용을 장사의 밑천으로 삼았다. 언제나 공손하고 친절한 자세를 유지해 단골이 많았다. 남녀 점원들은 모든 손님들에게 높임말을 쓰게 하고 단정한 복장을 강조했다. 구두를 오래 신기 위해 밑창에 징을 박는 일도 손님들이 시끄럽게 느낄 수 있다며 금지했다고 한다.


대구 무영당 앞에서 포즈를 취한 무영당 창립자 이근무(왼쪽)와 동요 시인 윤복진 <대구문학관 제공>

대구 무영당 앞에서 포즈를 취한 무영당 창립자 이근무(왼쪽)와 동요 시인 윤복진 <대구문학관 제공>

이근무는 청년들 사이에 '원하는 책은 웬만하면 모두 구해주는 수완가'로 통했다. 일제가 금서(禁書)로 지정한 좌익 서적이나 러시아 소설 등도 무영당에서는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근무는 일제강점기 대구의 일본인 상권과 경쟁하면서 민족자본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서점(문구점) 무영당이 크게 번창하면서 이근무는 자신의 백화점을 꿈꿨다. 경성의 백화점을 둘러보며 그 꿈을 키워갔다. 마침내 1937년 본래 영업하던 자리에 5층 건물을 신축해 대구 최초의 민족자본 백화점인 무영당을 열었다. 무영당은 당시로는 드물게 미국식 빌딩 개념을 도입해 대형화한 5층 규모의 흰색 타일로 마감한 건물이었다.


백화점으로 거듭난 무영당에는 여행구부, 양가구부(洋家具部), 식료품부, 완구부, 도도와기(陶陶瓷器), 식품부, 사진부 등이 추가돼 전국 단위 백화점으로 성장했다. 또한 전시실·식당·휴게실·전망대 등의 설비를 완비해 미나카이 백화점으로 대표되는 일본인 상권과 경쟁했다. 무영당 개업 당시 하루 이용객은 평균 5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1층에는 당시로선 드물게 쇼윈도가 있었다. 여름이면 해수욕 용품을 전시하고 겨울에는 스케이팅 용품을 선보여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조선인이 세운 백화점이란 동질감이 큰 몫을 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2층에 마련된 전시장은 조선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의 약속장소가 되고 청소년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당시 무영당 2층 전시장에서는 예술인들의 전람회와 발표회가 끊이지 않았다. 무영당은 백화점 사업 수익의 많은 부분을 당시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활동 후원에 사용하기도 했다. 올해 초 지역 청년작가들이 특별신년전을 여는 등 무영당은 예술 공간으로서의 맥을 잇고 있다.


무엇보다 창업주 이근무는 작곡가 박태준, 아동문학가 윤복진, 화가 이인성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당시 윤복진과 가까웠던 예술인으로는 작곡가 박태준과 화가 이인성이었다. 그는 박태준과 함께 많은 동요를 만들었다. 둘 사이는 각별했다. 박태준은 윤복진이 졸업한 대구계성학교의 음악 교사였고 윤복진이 다니던 남성정 교회(옛 제일교회) 성가대 리더이기도 했다. 박태준은 윤복진의 동요를 중심으로 1930년대 초 '중중 때때중' '양양 범버궁'이라는 동요집을 대구 무영당서점을 통해 발간하기도 했다. 1939년에도 윤복진의 동요를 중심으로 한 동요집 '물새 발자욱'을 발간했는데, 표지는 이인성의 판화로 장식했다. 이인성이 그린 그림에 윤복진이 동요를 쓴 '동시화전'이 무영당 백화점에서 열리기도 했다.


무영당은 자칫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이근무는 일제 말기 창씨개명을 하고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대구상공회의소 회원이 돼 몇 년을 근무하는 등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 때문에 무영당도 광복과 함께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 무영당 건물은 동흥상공주식회사로 사용됐다. 1960년에는 한국선교회유지재단에서 관리하다, 1969년부터는 부산비닐상사 건물로 사용됐다. 다행히 당시 건물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오다 2020년 철거되기 직전 대구시가 매입해 현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무영당은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 백화점 건물의 건축적 가치와 역사·문화적 가치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근대 문화유산이다.


글=박준상기자 junsang@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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