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근대 건축, 중구를 거닐다] <4> 정소아과

  • 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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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3-08 17:05  |  발행일 2026-03-08
화교건축가가 지은 대구 최초 서양식 주택
유명 소설에도 가장 운치 있는 곳으로 묘사
대구 중구 진골목 한 가운데의 정소아과의원. 1937년에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하고 건립한 것으로 대구 최초의 서양식 민간주택으로 1층은 살림집, 2층은 병원으로 사용됐다. <영남일보 DB>

대구 중구 진골목 한 가운데의 정소아과의원. 1937년에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하고 건립한 것으로 대구 최초의 서양식 민간주택으로 1층은 살림집, 2층은 병원으로 사용됐다. <영남일보 DB>

대구 종로는 조선시대 대구읍성 남쪽의 영남제일문에서 경상감영으로 이어지는 중심 거리였다. 종로에서 흘러나온 시냇물 같은 골목이 진골목이다. 진골목은 긴 골목이라는 뜻이다. '길다'의 경상도 사투리 '질다'에서 나왔다. 진골목 역시 읍성시절 종로처럼 감영까지 이어지는 긴 길이었다. 양반들은 종로를 통해 감영으로 들어갔고 백성들은 진골목을 통해 감영으로 향했다. 근대의 진골목은 부자들의 동네였다. 특히 달성서씨의 대저택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대구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해 그의 형제들이 모여 살았고.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 신도환,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도 진골목에 살았다. 부자들이 떠난 후 진골목의 저택들은 쪼개져 팔렸고 요정이나 술집이 되기도 했다.


현재 진골목은 100m 남짓 남아 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마치 어느 시골 읍내의 골목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 든다. 붉은 벽돌담과 곱게 둘러쳐진 돌담, 담 위로 훌쩍 솟아 자란 아름드리나무와 세월의 흔적이 배어나는 대문들, 도심의 소음조차 편안히 가라앉은 여유로운 풍경이다. 진골목의 많은 집들은 이제 이름난 음식점이다. 1970년대부터 속속 들어선 식당들은 옛 정취를 고스란히 이어가면서 훌륭한 먹거리로 명성을 얻고 있다.


◆진골목의 대명사…부호 주택이었다가 병원으로


골목의 한 가운데에 '정소아과의원'이라는 간판이 깃발처럼 걸려 있다. 오래된 사진 같은 그것은 실제다. 군데군데 녹슬고 색 바랜 하늘색 대문 너머 수목으로 울창한 정원과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집이 보인다.


이 집은 1937년에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하고 건립한 것으로 대구 최초의 서양식 민간주택이다. 정원 가운데에 연못이 있고 주변으로 아름드리 향나무가 여럿이다. 구석에 있는 작고 예쁜 기와집은 집사가 살았을 법한 별관이다. 본채에는 중국의 전통적인 창 구조인 원형 창이 있다. 두 개의 굴뚝은 난방을 하는 구조임을 말해준다. 이는 단순한 주택을 넘어 대구 화교 건축 기술과 근대 주거사가 결합된 '건축 박물관'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지붕은 모임지붕에 작은 슬레이트를 결합한 2중형이다. 1층에는 유리로 둘러싸인 일광실과 욕조 딸린 목욕탕이 있고 2층으로 올라가는 낮고 반들거리는 목재 계단이 매우 인상적이다.


정소아과 건물은 서병국의 방계 형제인 서병기의 저택이었다. 서병기는 이 집에서 살다가 동생인 서병직에게 물려줬고, 그 뒤에는 서병국의 자형인 경남의 하부자가 소유하는 등 주인이 몇 번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다 1947년 정필수가 매입해 '정소아과의원' 간판을 걸고 2층에 병원을, 1층은 살림집으로 꾸렸다.


정소아과의원. 군데군데 녹슬고 색 바랜 하늘색 대문 너머 수목으로 울창한 정원이 보이는 벽돌집이다. <영남일보 DB>

정소아과의원. 군데군데 녹슬고 색 바랜 하늘색 대문 너머 수목으로 울창한 정원이 보이는 벽돌집이다. <영남일보 DB>

◆전염병 돌면 환자 몰려 물 마실 시간도 없어


정필수 원장이 처음 진골목에 정소아과를 열었을 때는 광복 이후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였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어. 내가 경북대병원 숙직할 때도 쌀이 없어서 보리국수 먹던 때였으니. 썩는 냄새만 안 나면 뭐든 먹었지. 그마저도 아껴가며 먹었어. 냉장고는커녕 음식 보관해둘 찬장도 변변히 없던 때였으니 배탈을 달고 살 수밖에. 그 형편에 어지간해서는 병원 근처도 못 가. 집에서 이런저런 민간처방 해 보다가, 한약방 갔다가, 숨 넘어갈 때쯤 돼야 소아과로 오는 거야."


"아프리카 애들 있잖아. 뼈만 앙상하니 죽도 못 먹은 것 같은 애들.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애들도 꼭 그랬어. 그런 애들이 며칠 동안 설사를 좍좍 하고는 축 늘어져서 오는 경우가 태반이야. 전염병이라도 돌면 환자가 몰려 하루 종일 물도 한 모금 못 먹고 일했어. 병원이 2층이고, 1층이 집인데도 그랬지. 진료를 하려고 보면 죽어 있는 애들도 있었어. 몸은 뜨거운데 그새 숨을 놓은 거야. 바로 돌아서서 다른 환자를 봐야 하니 가슴 아플 새도 없었어."


"1·4후퇴 때 서울 사람들이 많이 왔어. 대구 사람들은 전문의가 뭔지도 모르던 때였지만 서울 사람들은 대구로 피난 와 셋방 살면서도 전문의를 찾았지. 집주인인 대구 사람이 세든 서울 사람 소개로 소아과에 오던 시절이었어. 그때 서울의 대학에서 건축과 교수 한다는 양반이 왔는데 첫 마디가 '이 집 절대로 고치지 마세요'였어. 한눈에 집의 가치를 알아봤다는 거야. 그러잖아도 잘 지은 건물이어서 고치고 싶은 마음은 안 들었어. 설계나 시공이 잘 돼 있어서 고칠 것도 별로 없었지. 그렇게 지내온 거야."


정필수 원장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정필수 원장의 기억은 당시 대구의 힘겨운 삶을 기록한 듯했다. 정소아과는 단순한 병원을 넘어 전쟁 난민과 영양실조 아동들의 생명을 지키는 '공공의료기관'의 역할을 사실상 대신했다.


◆김원일 소설 '마당깊은 집' 등장


대구 출신 현대 문학가 김원일이 1988년에 쓴 '마당 깊은 집'은 대구 종로거리와 진골목을 배경으로 6·25전쟁 이후 피난민의 삶을 그린 실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 '정소아과'가 등장한다. 실제 작가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진료를 받았다는 '정소아과'는 진골목의 건물 가운데 가장 운치 있고 흥미를 끄는 곳으로 묘사된다.


지금까지도 정소아과는 변한 것이 거의 없다. 목재 창을 알루미늄 새시로 바꾼 정도다. 정소아과는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축물이자 근대건축물 중 드물게 남아 있는 양옥 주택으로 당시 상류층의 주거문화와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정필수 원장은 62년 동안 진료를 하다가 2009년 건강상의 이유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2017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정진오 역시 소아과 의사가 됐고 부친이 떠난 다음 해 다시 정소아과의 문을 열었다. 그는 부친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병원 건물과 간판을 그대로 보존했고, 정소아과는 대구 진골목의 근대문화유산으로 남게 됐다.


박준상기자 junsa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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