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천만영화 절반이 ‘시대물’…한국이 사극을 사랑하는 이유는?

  • 조현희
  • |
  • 입력 2026-03-19 20:41  |  발행일 2026-03-19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마을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유배지를 택한 엄흥도와 왕위에서 밀려난 어린 선왕 단종의 이야기를 그린다. <쇼박스 제공>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마을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유배지를 택한 엄흥도와 왕위에서 밀려난 어린 선왕 단종의 이야기를 그린다. <쇼박스 제공>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사극'에도 관심이 모인다.


지난달 4일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는 개봉 31일째인 지난 6일 천만 관객을 넘겼다. 지난 16일 기준 누적 관객수 1천346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영화 가운데선 2년 만에 천만 신화를 쓴 작품이며, 5번째 흥행작이기도 하다. 영화는 1457년 청령포를 배경으로, 마을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유배지를 택한 엄흥도와 왕위에서 밀려난 어린 선왕 단종의 이야기를 그린다. 탄탄한 서사와 배우들의 열연으로 SNS를 통해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왕사남이 흥행하자 OTT를 통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몰아보고, 역사 스터디 모임에 나가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나누는 현상도 나타난다. OTT 플랫폼 웨이브(Wavve)가 제공하는 사극 영화 '관상'의 3월 첫째 주 총 시청 시간은 전주 대비 54% 급증했다. 단종이 유배지로 머물렀던 강원 영월의 청령포를 비롯해 여러 유적지에도 관광객들이 몰린다.


그런데 역사 콘텐츠의 흥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사극이란 장르는 한국 영화계에서 보증수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됐다. 사극은 어떻게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한국전쟁 속 형제애를 담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스틸컷.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한국전쟁 속 형제애를 담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스틸컷.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역대 한국 천만영화 25편. 3월16일 기준 왕과 사는 남자는 관객수 1천346만명으로 5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픽=염정빈기자 seol908@yeongnam.com

역대 한국 천만영화 25편. 3월16일 기준 '왕과 사는 남자'는 관객수 1천346만명으로 5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픽=염정빈기자 seol908@yeongnam.com

◆검열이 만든 은유의 미학…'현실 비추는 거울'


역대 한국 천만영화 25편을 분석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12편(48%)이 시대물로 나타나 장르적 편중이 뚜렷했다.


먼저 1960년대 김일성 참수부대를 소재로 한 '실미도'가 2003년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달성했다. 그 다음 해인 2004년엔 한국전쟁 속 형제애를 담은 '태극기 휘날리며'가, 2005년엔 연산군 시대 광대의 삶을 그린 '왕의 남자'가 잇달아 흥행했다. 역대 관객수 1위도 '명량'(2014)으로 무려 1천761만명을 기록했다. 명량해전을 떠난 이순신 장군이 국민의 3분의 1을 극장으로 불러냈다. 올해도 '몽유도원도' '국제시장 2' '암살자(들)' 등 시대물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사극은 부조리한 현실을 역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꼬집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연상케 하는 역사적 사실을 가져와 이야기하면 현실 문제를 보다 쉽게 비판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은 오랜 시간 검열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면서, 현실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무언가에 빗대어 말하는 작품이 발전해왔다.


김성수 문화평론가는 "한국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정치의 '정' 자도 작품에서 꺼내지 못하는 시대를 겪었기 때문에 에둘러서 표현하는 데 탁월한 기술을 갖게 됐다"며 "이 기술이 지금의 사극 영화들로 이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중도 이런 표현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더욱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영화 암살에서 민족반역자 염석진이 반민특위 법정에 출석해 재판장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쇼박스 제공>

영화 '암살'에서 민족반역자 염석진이 반민특위 법정에 출석해 재판장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쇼박스 제공>

1949년 반민특위 재판 공판 모습. 친일파들에게 합법적으로 면죄부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위키백과 제공>

1949년 반민특위 재판 공판 모습. 친일파들에게 합법적으로 면죄부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위키백과 제공>

◆역사 콤플렉스 정면 돌파…대중에 대리 만족 선사


특히 한국의 시대물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역사적 콤플렉스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대중의 욕구를 해소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대표적으로 2015년 개봉한 천만영화 '암살'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 명을 암살 작전에 투입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주목할 만한 점은 마지막 장면이다. 법정에서 친일파 염석진이 교묘하게 처벌을 피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법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국회가 구성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운영하는 특별재판소다. 반민특위는 일제에 협조해 반민족행위를 한 자를 조사하기 위해 1948년 꾸려졌지만,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고 민족반역자들에게 합법적으로 면죄부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 암살 스틸컷.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 명을 암살 작전에 투입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쇼박스 제공>

영화 '암살' 스틸컷.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 명을 암살 작전에 투입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쇼박스 제공>

반면 영화는 친일파 염석진이 결국 암살당하는 허구를 더했다. 정병기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의 저서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는 이에 대해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고 진정한 역사적 판단이라는 점에서는 정당한 청산"이라며 "현실에서는 (염석진으로 대표되는) 파시즘적 보수가 권력을 유지하지만, 영화에서 이들이 처단됨으로써 과거 극복의 청산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객들도 이런 서사에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말했다. 직장인 박선영(28)씨는 "현실에서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인물이 많은데, 영화에서라도 응징되는 모습을 보면서 속이 시원했다"며 "결말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의미있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광해군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스틸컷. <CJ ENM 제공>

광해군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스틸컷. <CJ ENM 제공>

◆고유 문화·풍부한 사료로 스토리텔링 용이


한국의 사극이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하는 가운데, 그중에서도 유독 많이 나오는 배경은 따로 있다. 바로 조선시대다. 천만영화 상당수가 조선 왕실 이야기를 그린다. 왕사남을 비롯해 '관상'(수양대군), '왕의 남자'(연산군), '광해, 왕이 된 남자'(광해군), '사도'(사도세자)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의 역사가 자주 다뤄지는 건 먼저 고증이 쉽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방대한 사료가 축적돼 있고, 야사(野史)와 민간 설화도 풍부해 서사를 확장하기 용이하다. 여기에 500년에 걸친 단일 왕조는 세계적으로 유일한 '문화 원형'이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더라도 독창적인 이야기가 된다. 문화 원형은 다른 민족·지역과 구별되는 고유한 정체성을 담고 있는 문화를 뜻한다.


이희정 대구대 교수(문화예술학부)는 "조선시대는 실증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에 영화를 제작할 경우 스토리의 기초 작업이 이미 돼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또 "문화 원형이라는 건 집단 기억과도 맞닿아 있는데,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연령에 상관없이 전 관객층이 쉽게 관람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 명량. 역대 한국영화 중 관객수 1위다. <CJ ENM 제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 '명량'. 역대 한국영화 중 관객수 1위다. <CJ ENM 제공>

김성수 평론가도 "조선시대는 자료가 많다보니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상상을 펼칠 수 있다"며 "자료가 지나치게 많으면 오히려 창작이 힘들지만, 적당히 많기 때문에 작가가 상상력을 덧붙이고 재해석하기 좋은 조건"이라고 했다. 이어 "'왕과 사는 남자' 역시 역사를 재해석한 영화인데, 우리나라 국민 중에는 역사를 좋아하고 조선 왕조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더욱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보편적인 서사를 만들기도 적합하다. 이희정 교수는 "대중이 재미있어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선과 악의 대결"이라며 "영웅이 나오고, 그 다음 영웅을 방해하는 악당이 등장하는데 왕실 이야기는 선악 구도나 갈등 구조를 설정하기 용이하다"고 했다.


지난 4일 성주 별고을 시네마에서 관람객들이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한 포스터를 살펴보고 있다. <영남일보 DB>

지난 4일 성주 별고을 시네마에서 관람객들이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한 포스터를 살펴보고 있다. <영남일보 DB>

◆"고증 불확실성 우려" vs "서사 구조에 집중해야"


다만 사극이 흥행할 때마다 역사학계에선 고증에 대한 불확실성과 관련해 우려가 크다. 극적 재미를 위한 허구가 실제 기록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역사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것이다. 왕사남에 대해서도 △단종은 유배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는데 영화 속 단종은 수시로 강을 건너고 유배지를 이탈한다는 점 △금성대군이 거병한 것은 기록에 없다는 점 △'세종실록'에 측우기의 발명자는 문종으로 기록돼 있지만 영화 속 단종은 "측우기를 만든 사람은 노비(장영실)였다"고 말하는 점 등이 고증 오류로 지적됐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극을 역사적 고증에만 가둬놓으면 역효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때론 고증과 상상력의 적절한 조화가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성수 평론가는 "역사 콘텐츠라고 하는 것은 항상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이라며 "고증의 측면에서만 보면 분명 허점이 많지만, 관객은 그런 허점들을 논하는 게 아니라 서사 구조를 본다"고 지적했다. 이어 "'왕과 사는 남자'도 '불쌍한 왕' '무력한 왕'이라는 단종의 기존 프레임을 깼기 때문에 대중의 마음속에 남은 것"이라고 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도 "'왕과 사는 남자'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발상의 전환과 상황 설정의 차별화, 캐릭터의 익숙함과 색다른 형상화 등으로 '천만 고지'를 밟을 자격이 충분한 영화가 됐다"고 평했다.


영화 왕의 남자 스틸컷. 조선 중기 두 광대와 연산군의 이야기를 그린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영화 '왕의 남자' 스틸컷. 조선 중기 두 광대와 연산군의 이야기를 그린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한편 문화예술 전문가들은 한국 사극의 글로벌 흥행 가능성에 대해 "무궁무진하다"고 진단했다. 이희정 교수는 "최근 K-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은 가운데, 사극은 기존에 익숙하게 보던 한국 문화가 아니라 더욱 낯선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며 "한복·궁궐 등 시각적 요소만으로도 외국인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자 이미지

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생활/문화인기뉴스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