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재현의 사진 귀 기울이기] 침묵의 소리

  • 석재현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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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4-15 10:52  |  발행일 2026-04-17
병, 2018, Archival Pigment Print, 100x80㎝

병, 2018, Archival Pigment Print, 100x80㎝

벽도 바닥도 드러나지 않는 회색의 공간. 그 위에 무채색의 토기들이 놓여 있다. 유물 복원가가 원형을 상상하며 조심스럽게 이어 붙였지만, 이들의 그림자는 여전히 미완의 형태를 길게 드리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지고 갈라진 틈 사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는 오히려 어떤 아름다움이 떠오른다.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을 머금은 이들은 한때 우리 선조들의 삶 가까이에 머물렀던 존재였고, 오랜 시간을 땅속에서 견딘 끝에 이제야 밝은 빛 아래 놓여 있다.


석굴암과 불국사, 첨성대와 왕릉, 그리고 남산까지, 천년의 역사와 문화가 보석처럼 빛나는 고장 경주.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왕조의 찬란한 유물들이 스며 있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진가가 바로 이순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처음 유물 촬영을 시작한 곳은 경남 양산의 성보박물관 전시물이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03년 어느 봄날, 사진가 이순희는 옛사람의 숨결이 남아 있는 현장의 발굴 유물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옹, 2014, Archival Pigment Print, 127x102㎝

옹, 2014, Archival Pigment Print, 127x102㎝

개발로 인해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낸 토기들은 아가리 부분인 구연부와 몸통인 동체부, 그리고 밑부분인 저부가 때로는 여러 조각으로, 때로는 무수한 잔해의 형태로 발견되었다. 마치 가녀린 숨을 위태롭게 이어가는 존재처럼. 그러나 백 년 남짓을 살아가는 인간과 달리, 천년의 시간을 지나온 이들에게서는 부침 많은 세월이 응축된 시간성과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동시에 감돌았다. 하지만 여러 발굴기관과 유물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그 강렬함은 작업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을 지나고 말았다.


호, 2019, Archival Pigment Print, 185x148㎝

호, 2019, Archival Pigment Print, 185x148㎝

이순희 작가의 작업노트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어느 날, 나는 오랜 시간 내 삶 속에 머물던 이들의 '침묵의 소리'에 주목하게 된다. 물론 그 유물들이 내는 소리를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 좀 더 자신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주기를 바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빙그레 미소가 절로 났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사진가가 20년 가까이 강렬한 끌림을 외면해왔으니 이제는 들리지 않는 그 침묵까지 붙잡게 된 걸까 하고 말이다.


호, 2020, Archival Pigment Print, 100x80㎝

호, 2020, Archival Pigment Print, 100x80㎝

이 토기의 옛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작가의 작업은 이러한 상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비추는 빛의 각도와 그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 그리고 파편 상태로 남아 있는 형상이 만들어내는 상징성까지, 작가는 이 모든 요소를 하나의 존재로 드러내고자 했다. 때로는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삶의 무게를 견디는 우리의 모습처럼 느껴졌고, 때로는 깨진 조각들이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도 했다. 그들이 누구였으며, 어떤 손길과 함께였는지를 전하는 듯한 침묵의 목소리가 어떤 감각에 가깝다면, 작가는 그 불확실한 감각을 이미지로 붙잡아 하나의 존재감으로 각인시킨다.


호, 2023, Archival Pigment Print, 127x102㎝

호, 2023, Archival Pigment Print, 127x102㎝

사실 이 토기들이 머물 곳은 전시장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땅속에서 보내다 잠시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다시 어두운 수장고에 보관될 운명이었다. 왕의 무덤에 함께 묻힌 화려한 부장품도 아니고, 보물로 지정될 만한 가치를 지닌 유물도 아니며, 형태조차 온전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지극히 평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 토기들이 단 한 번 밝은 조명 아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색인 작업을 위한 통과의례 덕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들의 침묵의 소리는 유독 강렬했고, 이순희라는 사진가였기에 더욱 크게 들려왔을 것이다.


사진가 이순희. 그녀는 유물 사진에 진심이다. 발굴 유물을 3년 정도 찍었을 때, 어느 순간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아무리 열심히 찍어도 결과물이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발굴이 한발 앞서 있던 일본의 자료를 뒤진 끝에, 사진이 인상 깊었던 한 연구소를 통해 사진가에게 직접 연락을 했다. 무슨 용기에서였을까. 함께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말을 건넸고, 한 달간 흑백 필름 작업을 함께 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촬영한 사진이 출판과 인쇄 과정에서 기대만큼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자신의 작업은 치열하게 무르익어야 한다는 마음. 그 마음은 지금까지도 흔들림 없이 이어지고 있다.


정령의 숲2 78x55㎝, Archival Pigment Print, 2013

정령의 숲2 78x55㎝, Archival Pigment Print, 2013

깨진 토기에서처럼 작가에게 사람의 형상이 그려졌던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경주 계림에서 발견한 나무다. 신라 천년의 시간과 김알지의 탄생 신화를 간직한 대표적인 역사와 신화의 숲, 그곳의 나무들은 수많은 문화유적과 신라의 땅을 지켜왔다. 무리를 이루고 있지만 각기 홀로 자라는 나무들은 거대한 뿌리를 드러낸 채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햇살을 향해 길게 가지를 뻗어 하늘을 이고 있는 모습은 작가에게 밀집된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상처럼 다가왔다. 마치 영혼이 깃든 듯한 나무들. 홀로 선 나무들은 저마다의 정령을 품고 있었고, 그렇게 '정령의 숲' 작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밝은 낮에 촬영한 나무는 작가에게만 사람의 형상으로 보일 뿐, 다른 이들에게는 쉽게 공감을 얻지 못했다. 휘어지고 굽은 고목의 신비로움과 그들이 견뎌온 시간을 드러내기에는 겨울이, 그리고 밤이 더 적합했다. 음력 설이 지나고 나뭇잎이 떨어진 뒤 새잎이 나오기 전까지, 약 보름 남짓한 시간 동안 낮에는 나무를 찾고 밤에는 촬영을 이어갔다. 주변의 복잡한 요소를 걷어내고 형태를 극대화시키는 스트로보 조명 아래, '정령의 숲'은 때로 인간 세상을 굽어보는 듯하고 때로는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으로, 강인한 생명력과 존재감을 또렷이 드러낸다.


정령의 숲4-1 105x146㎝, Archival Pigment Print, 2013

정령의 숲4-1 105x146㎝, Archival Pigment Print, 2013

태어나 자란 곳이라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던 경주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은 유물 촬영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때 피어난 역사에 대한 관심은 사진학과에서 석사를 마친 그녀를 다시 민속학으로 이끈다. 그 덕분일까. 사진가 이순희의 물리적 시선은 경주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 애써 찾아가지 못하면 마주할 수 없는 장소로 향한다. 그녀의 작가적 시선 또한 사람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곳에서 조용히 존재를 드러내는 대상에 가닿는다. 깨진 토기들의 침묵이 그녀에게 닿은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주에 들어서면 우리는 커다란 얼굴무늬 수막새 조형물을 마주하게 된다. '신라의 미소'로 알려진 이 수막새는 지름 11.5㎝ 남짓의 작은 기와 조각에 불과하며 아래쪽은 투박하게 깨져 나간 상태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더 인간적이며 오랜 시간을 견뎌낸 흔적 속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수장고의 토기 또한 누군가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불완전한 존재를 끝까지 길어 올린 사진가 이순희의 이 작업이 누군가에게, 토기의 침묵에 귀 기울이고 조용히 눈여겨보게 하는 울림으로 다가서길 바란다.


정령의 숲4-3, 55x78㎝, Archival Pigment Print, 2013

정령의 숲4-3, 55x78㎝, Archival Pigment Print,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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