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지속적인 거짓말의 효과는 거짓을 진실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고 선고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대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좋은 근거와 신뢰할 만한 출처, 타당한 논의 등 지식과 행동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는 것, 이는 가스라이팅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스웨덴 철학자 오사 빅포르스가 '진실의 조건'(2020)에서 한 말이다. 이는 미국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거짓말의 역할에 대해 한 말을 해설한 것이지만, 오늘날의 한국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혜안을 보여준다. 국가균형발전에 관한 한 한국은 '거짓말 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헌법 제1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은 어디에 거주하든 지역 간 혹은 지역 내에서 평등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삶의 기회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또한 헌법 제119조와 제122조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유지와 이의 공간적 과정으로 국토균형의 형성에 관한 국가의 책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 제11조·119조·122조는 아무도 지키지 않는 빈 껍데기, 아니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 물론 균형발전을 위해 나름 애를 쓴 정권들도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역대 정권들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모두 이 나라를 '서울공화국'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는 걸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먼 훗날 문헌을 통해 이 시대를 연구하는 후학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언론을 통해 널리 보도된, 역대 정권들이 생산해낸 공식 담론은 지겨울 정도로 균형발전을 외치고 있으며, 그걸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치인들의 주장이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자와 정치인이 균형발전을 외쳤는데도 '지방소멸'이 임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외침이 빈말이거나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균형발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 권력자·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내가 발견한, 유일하게 진실을 말한 이는 1963년에서 1966년까지 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이다. 그는 "농촌인구가 서울에 모여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서울을 좋은 도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그는 심지어 "지방민의 서울 이주를 허가제로 하는 입법"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윤치영의 신념과 제안엔 동의할 수 없지만, 균형발전에 관한 한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왜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는가? 권력과 부, 그리고 그 권력과 부에 접근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인 명문 대학과 좋은 일자리가 서울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이걸 분산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면서 균형발전을 외치는 건 사기다. 그런데 그런 사기가 중앙정부는 물론 정치인들에 의해 자행돼 온 게 우리 현실이다.
지방이 힘을 합쳐 한 목소리를 내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중앙권력은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지방을 분열시키는 '분할지배' 전략을 썼다. 영호남 지역은 균형발전엔 이렇다 할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자기들이 원하는 대통령을 만들어 지역이익을 취하는 데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그래서 지방선거는 대선이나 총선과 같은 성격의 선거로 변질되었으며, 작게는 자기 지역으로 예산과 기업을 끌어올 수 있는 강력한 줄을 누가 갖고 있느냐를 겨루는 경연대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건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4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지방 없는 지방선거"(중앙일보, 2022년 5월5일), "중앙정치 '손'에 좌지우지…지방선거에 '지방'이 없다"(경향신문, 2022년 5월19일), "풀뿌리민주주의 뿌리가 썩고 있다"(시인 김택근, 경향신문, 2022년 6월11일), "군수까지 대통령이 결정하는 이런 사이비 지방선거는 이제 그만하자"(인하대 교수 윤홍식, 한겨레, 2022년 6월13일) 등과 같은 기사 제목들이 시사하듯이, 지난 30년간 변함없이 관철돼 온 법칙은 "지방선거에 지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4년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2026년 2월19일 대통령 이재명은 "해양수산부 이전, 해사법원 설치에 이어 동남권 투자공사 설립은 물론 HMM 이전도 (부산으로) 곧 한다"고 밝혔다. 4월30일엔 SNS에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올리면서 "HMM 부산 이전, 이재명은 했습니다"라고 뻐겼다. 이래도 되나?
지방선거에 따라붙기 마련인 국회의원 보궐선거에까지 청와대가 동원되는 느낌마저 주자 "청와대가 '총선 캠프' '정치 스펙용'이냐"는 비아냥이 터져나왔다. 청와대가 뛰는 데 당이라고 가만 있겠는가. 어느 후보는 "1조원을 공항 건설의 마중물로 쓰는 것과 관련해 당 지도부로부터 확약을 받았다"는 말까지 했으니, 이걸 어이하랴.
특정 진영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정부여당이 총동원돼 여당 후보를 지원하는 건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번갈아가면서 저질러 온,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형 진영정치의 법칙이 아닌가. 지금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지방의 발전이 중앙권력의 선별적 지원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과 관행이 우리 모두를 위해 좋으냐 하는 것이다. 진영을 초월해 작동하는 중앙권력의 집요한 '지방 가스라이팅'을 언제까지 지속할 생각인가.
그건 지방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죽이는, 사실상 지방을 골병들게 만드는 독약과 다를 게 없다. 중앙의 지원을 위해선 정권이 필요하고, 정권을 잃는 건 죽음과도 같은 일이니 선거가 목숨을 건 전쟁이 되는 게 아닌가. 이러려면 민주주의는 뭣 때문에 하는가? 차라리 일당독재의 효율성을 위해 중국식 모델을 도입하자고 하는 게 정직한 태도 아닌가? 이걸 민주주의라고 믿는다면, 그게 바로 가스라이팅의 효과일 게다.
중앙권력은 지방민과 지방 기업들에게 과감한 세제 혜택을 준다든가 하는 보편적 대책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보다는 선별적으로 특혜를 주는 걸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중앙권력은 지방민들에게 이런 생각을 주입시킨다. "당신들은 스스로 해낼 능력이 없어. 괜히 힘빼지 말고 우리에게 표를 줘. 그러면 예산도 듬뿍 주고, 공공기관도 이전시켜주고, 대기업이 공장을 짓도록 압력을 넣어줄게. 원칙에 의한 균형발전? 그것보다는 각자 알아서 자식을 서울 명문대에 보내는 게 낫지 않나? 그게 훨씬 빠르고 확실한 신분 상승의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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