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현대 대구 9층에서 열린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 하츠네 미쿠' 팝업 스토어를 찾은 방문객들이 포토 부스에서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대체공휴일이었던 지난 25일 오후 2시, 더현대 대구 9층.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가장 먼저 형형색색의 캐릭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날은 모바일 리듬게임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 하츠네 미쿠' 팝업 스토어의 마지막 운영일로, 현장은 이를 찾은 팬들로 북적였다. 게임 속 캐릭터 코스프레를 한 팬들도 눈에 띄었다. 2030 세대가 대부분이었지만 젊은 부모와 함께 찾은 아이들도 꽤 있었다.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 하츠네 미쿠' 팝업 스토어에서 판매 중이었던 굿즈 일부. 인기 캐릭터 '미쿠'의 상품은 품절이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팝업 스토어에 입장하려 하니, 현장 대기줄이 길어 사전 예약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 2시 기준 예약 가능한 시간대는 마지막 타임인 오후 4시30분뿐이었다. 예약을 걸어둔 뒤 상점 주변을 둘러보니 포토 부스 앞에도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캐릭터 프레임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실물로 받아볼 수 있었다. 팝업스토어 매장 안쪽 진열대에는 캐릭터들의 이미지가 담긴 티셔츠와 아크릴 스탠드, 배지, 쿠션 등이 빼곡히 진열돼 있었는데, 인기 캐릭터의 상품은 대부분 품절이었다.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 하츠네 미쿠' 팝업 스토어를 찾은 방문객들이 굿즈를 구경하고 있다.
한때 소수의 취향으로 여겨졌던 '서브컬처'(하위문화)가 뜨고 있다.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게임, 웹소설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서브컬처는 이제 일부 마니아층의 전유물을 넘어 주류 문화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굿즈를 구매하고 팝업 스토어를 방문하는 건 물론, 애니메이션 속 장소를 직접 찾아가는 '성지순례 여행'까지 확산하면서 관련 시장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카카오게임즈 자회사 라이온스튜디오가 올해 발매하는 서브컬처 RPG 게임 '프로젝트C'. <라이온스튜디오 제공>
◆플랫폼·세대교체·팬덤 문화…대중화된 서브컬처
이날 팝업 스토어에서 만난 팬들은 단순히 상품을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같은 취향을 공유하며 현장 분위기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대학생 김예은(22)씨는 "예전에는 이런 서브컬처 문화를 즐기려면 서울에 가야 했는데, 대중화가 되고 나서 지방에서도 팝업 스토어나 굿즈를 쉽게 접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김씨와 함께 방문한 강성현(23)씨는 "예전에는 캐릭터를 '덕질'하는 일이 숨겨야 할 취미처럼 느껴졌는데, 국내에서도 시장이 커지고 있어 이제는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함께 즐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프로젝트 세카이 컬러풀 스테이지! feat. 하츠네 미쿠' 팝업 스토어 입구. 사전 예약을 통해 입장할 수 있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폐쇄적인 취미로 인식됐던 서브컬처는 어떻게 이만큼 대중화될 수 있었을까. 먼저 디지털 환경의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대본소를 찾거나 불법 다운로드에 의존해야 했던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이제는 OTT와 웹 콘텐츠 플랫폼 등을 통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박지형 문화평론가는 "OTT의 등장으로 콘텐츠를 전 세계에 유통할 수 있게 된 점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며 "과거에는 대중적인 작품만 제작됐다면, 이제는 특정 취향을 가진 팬층만 확보해도 수익이 가능해지면서 마이너한 장르도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구 동성로 스파크랜드 3층에 들어선 애니메이션 굿즈숍. 피규어 등을 판매한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창작 생태계 변화도 시장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박 평론가는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에는 대본소 중심 구조라 창작자 수익이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수익이 창작자에게 직접 돌아가는 구조가 형성됐다"고 했다. 이어 "특히 만화나 웹소설의 경우 많은 인재가 유입되고 이는 양질의 콘텐츠 생산으로도 이어지고 있다"며 "이제는 고학력자나 전문직 종사자들도 창작 시장에 뛰어들 정도로 산업 규모와 위상이 커졌다"고 말했다.
여기에 서브컬처에 친숙한 1990년대생이 성인이 되어 문화를 더 적극적으로 향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어릴 적부터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자란 세대다. 과거에는 쌈짓돈으로 제한적으로 소비했다면, 이제는 구매력을 갖춘 주소비층이 되면서 적극적으로 지갑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전문 매장 '애니메이트'가 입점한 서울 홍대 AK플라자 외관. <AK플라자 제공>
이들 사이에서 형성된 '덕질' 문화로 대중화는 더욱 가속됐다. 서브컬처 콘텐츠는 캐릭터와 세계관에 대한 팬들의 깊은 애정을 기반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팬덤의 응집력이 특히 강하다. 이런 특성으로 SNS에선 같은 장르나 콘텐츠를 좋아하는 팬들끼리 계정을 '팔로우'하며 소통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굿즈를 구매해 인증하거나 팝업 스토어 후기를 공유하는 등의 게시물이 끊임없이 올라오는데, 이를 본 다른 이용자들이 관심을 가지며 소비가 재확산하는 구조다.
◆굿즈 사고 성지순례 여행까지…상권도 살아날까
일본 애니메이션 전문 매장 '애니메이트' 입점으로 '오타쿠 성지'가 된 서울 홍대 AK플라자 매출은 2021년 277억원에서 꾸준히 성장해 지난해 982억원까지 껑충 뛰었다. 이 같은 흥행에 힘입어 온라인상에는 "대구에도 '애니메이트'가 생기면 좋겠다" "지방에도 애니 굿즈 매장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대구 동성로에 최근 문을 연 애니메이션 굿즈숍 SMG굿즈스토어 내부.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서울 상권만큼 크진 않지만, 대구에도 서브컬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하나둘 늘고 있다. 동성로 일대만 해도 애니메이션 굿즈 전문점, 피규어숍 등 서브컬처 상점이 10곳 넘게 자리한다. 최근 몇 년 새 관련 상점이 크게 늘면서 이들 서브컬처 소비층의 유입이 침체된 지역 상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동성로에서 관련 매장을 운영하는 A씨는 "요즘 동성로 상권이 많이 어렵긴 하지만, 애니메이션 덕질을 하기 위해 이 일대를 찾는 소비층은 꾸준히 늘고 있다"며 "음식 앞에서 좋아하는 캐릭터 굿즈나 인형을 들고 인증샷을 찍는 문화가 퍼지면서, 주변 카페나 식당까지 함께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 상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동성로가 서울 홍대처럼 '오타쿠 문화의 성지'로 자리 잡는다면, 대구 전체적으로 외부 방문객 유입이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세계적인 서브컬처의 성지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 현지인보다 관광객이 더 많았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이 같은 열풍은 국내 소비에서 그치지 않고 여행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장소를 직접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여행 플랫폼 '트립닷컴'을 운영하는 트립닷컴 그룹은 최근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성지순례' 트렌드가 아시아 전역에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서브컬처 콘텐츠의 중심지로 꼽히는 일본이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용자들은 '애니메이션' '코믹' '애니메이션 투어' 등 키워드를 중심으로 여행 정보를 탐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한국 이용자의 관련 여행 키워드 검색량은 143% 증가했다. 직장인 김지영(28)씨도 지난달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의 배경지를 둘러보기 위해 일본 도쿄를 찾았다. 김씨는 작품 속 장면이 떠오르는 거리와 상점을 직접 방문하며 사진을 찍고 굿즈 매장도 함께 둘러봤다고 했다.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지 일본 가마쿠라.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장소에 직접 찾아가는 '성지순례 여행'이 뜨고 있다. <언스플래쉬 제공>
업계 관계자들은 서브컬처 열풍이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미 탄탄한 팬덤을 구축했고, 콘텐츠 생산 역시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내에서 생산된 서브컬처 콘텐츠에 대한 지원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콘텐츠는 애니메이션·굿즈·게임·관광 등이 결합된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한 반면, 국내 시장은 아직 제작 기반과 투자 환경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서브컬처 콘텐츠는 청소년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소비 시장이 형성돼 있지만,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어린이용 콘텐츠라는 인식이 강했다"며 "그 결과 하위문화에 머무는 경향이 있었고, 지원 역시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AI 기술이 발전하는 가운데, 애니메이션의 경우 실제와 똑같아야 하는 부담이 적어 인공지능을 활용했을 때의 성과가 영화보다 좋을 수 있는 장르"라며 "젊은 세대 사이에서 서브컬처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만큼, 최근 이뤄지고 있는 AI 기반 영상 콘텐츠 지원 역시 애니메이션 분야를 중심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조현희
문화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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