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국 오타쿠 성지 된 대구 “우린 ‘동키하바라’서 논다”

  •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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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5-09 08:03  |  수정 2025-05-09 11:55  |  발행일 2025-05-09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국 오타쿠 성지 된 대구 “우린 ‘동키하바라’서 논다”

대구 스파크랜드 3층. 한 층 전체가 가챠샵, 굿즈샵 등 오타쿠를 위한 상점들로 채워져 있다. 조현희기자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국 오타쿠 성지 된 대구 “우린 ‘동키하바라’서 논다”

대구 스파크랜드 3층에 위치한 애니메이션 굿즈샵 '토이도'. 조현희기자

찰캉찰캉. 뽑기 기계 손잡이가 돌아간다. 옛 문방구 앞에 있던 뽑기 기계와 얼핏 비슷하게 생겼다. 캡슐이 나온다. 한 손에 쥐어지는 캡슐 안에는 작은 키링(열쇠고리)이 들어 있다. 캡슐을 뽑은 여자는 아쉬워한다. 원하던 상품이 아닌 듯하다. 그런 망설임도 잠시. 바로 옆에 줄지어 선 다른 기계들로 시선을 옮긴다. 또다시 들려오는 '찰캉찰캉' 소리. 다른 이들도 비슷한 모습이다.

이곳은 대구 동성로에 위치한 '가챠샵'이다. 가챠샵의 '가챠'는 '찰캉찰캉'이라는 뜻의 일본어 '가챠가챠'에서 유래한 단어다. 캡슐 토이를 뽑는 기계에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릴 때 철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을 표현한 이름이다. 손잡이를 돌리면 작은 인형이나 키링·장난감 등이 무작위로 나오는 구조다. 캡슐에는 피규어, 인형, 키링 등 다양한 장난감이 담겨 있다. 서울 홍대에서 시작해 대구 동성로, 부산 서면 등 도심 번화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서울 홍대가 '오타쿠 성지'로 주목받게 된 것처럼, 동성로도 오타쿠(일본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팬)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가차샵은 물론, 만화·애니메이션 굿즈(goods)를 파는 상점들, 캐릭터 테마 카페 등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마치 도쿄의 아키히바라 같다. 비주류 하위 문화가 양지(陽地)로 나왔다. 온라인 상에도 '대구 오타쿠 투어'를 주제로 한 게시물들이 올라온다. '동키하바라'(동성로+아키하바라)로 나가 그 현장을 살펴봤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국 오타쿠 성지 된 대구 “우린 ‘동키하바라’서 논다”

대구 스파크랜드 3층에 위치한 가챠 기계들. 짱구는 못 말려, 산리오, 치이카와 등 종류가 다양했다. 조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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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로에 위치한 애니메이션 굿즈샵에 만화 '도쿄 리벤저스'의 캐릭터 피규어들이 진열돼 있다. 조현희기자

“대구 오타쿠 거리 정리. 동성로를 중심으로 오타쿠들이 갈 수 있는 굿즈샵, 가챠샵, 건담샵(피규어 쇼핑몰) 등을 정리했습니다."

SNS에 '동성로 오타쿠'의 키워드를 검색하니 나온 내용이다. 한 유저가 만든 '대구 오타쿠 거리 지도'. 상점이 12개나 정리돼 있었다. 대부분이 동성로 한복판에 위치한 곳이었다. 더 찾아봤다. 2·28기념공원 뒤편에 위치한 스파크랜드는 건물 3층 전체가 오타쿠를 위한 상점으로 채워져 있단다.

현장을 찾았다. 먼저 스파크랜드 3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중앙에 위치한 수십 개의 가챠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옆으로는 4개의 굿즈샵이 들어서 있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는 명탐정 코난 연재 30주년 기념 전시회도 열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직장인 김도연(26)씨는 '동성로 오타쿠 투어'를 하러 구미에서 대경선을 타고 왔단다. “(스파크랜드) 근처에 다른 굿즈샵도 많고, 종류도 많아서 하루 만에 다 둘러보기 힘들어요. 한 가게에서만 몇십 분씩 구경하게 되니까요. 당일치기로 왔는데, 다음엔 이틀은 잡고 오려고요."

가챠는 짱구는 못 말려, 산리오, 치이카와, 빤쮸토끼 등 최근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캐릭터 굿즈부터 아기자기한 장난감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한 번 뽑는 가격은 4~6천원 사이. 아이들이 많을 거란 생각과는 다르게 성인이 대다수였다. 강지영(23)씨는 피규어를 사 모으는 '수집광'이다. 처음엔 가챠가 피규어보다 싸서 뽑기 시작했는데, 모으다 보니 더 위험하다고. “한 번 뽑을 땐 5천원인데, 열 번 하면 벌써 5만원이잖아요. 어느새 계속 뽑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그래도 나중에 원하는 캐릭터 나오면 뿌듯하죠."

가챠샵의 또 다른 특징은 기계 라인업이 수시로 바뀐다는 점. 인기 캐릭터 시리즈는 금세 품절되고 또 다른 시리즈가 들어온다. '다음엔 뭐가 들어왔을까' 하는 궁금증도 발걸음을 다시 끄는 요인이다. 인근에서 다른 가챠샵을 운영하는 상인 A씨는 “인기 있는 시리즈는 며칠이면 다 빠질 때도 있다"며 “요즘엔 애니메이션 신작이 나오거나 영화가 개봉하면 그 시리즈 중심으로 기계를 바꾼다. 소비자 반응이 빠르다 보니 계속 바꿔줘야 한다. 그래야 돌아온다"고 설명했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국 오타쿠 성지 된 대구 “우린 ‘동키하바라’서 논다”

일정 금액의 복권 티켓을 구매하면 무작위로 경품이 주어지는 제일복권 '이치방쿠지'. 조현희기자

같은 층에 위치한 굿즈샵들은 원피스, 명탐정 코난, 하이큐, 귀멸의 칼날, 주술회전, 도쿄 리벤저스 등 인기 작품들이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흔히 알려진 피규어뿐만 아니라 아크릴 스탠드, 키링, 캔뱃지, 포토카드 등 굿즈도 폭넓게 취급한다. 이곳도 가챠샵처럼 '랜덤박스형' 상품이 두드러진다. 대표적으로 '이치방쿠지'다. 일정 금액의 복권 티켓을 구매하면 무작위로 경품이 주어지는 제일복권이다. A~G 등급별로 상품이 정해져 있다. 웨하스 과자와 캐릭터 카드가 함께 들어 있는 굿즈형 과자 제품도 인기다. 저렴한 가격에 랜덤 카드 수집의 재미가 더해져 소비자들이 부담 없이 찾는 굿즈 중 하나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전국 오타쿠 성지 된 대구 “우린 ‘동키하바라’서 논다”

오타쿠 경제학을 뜻하는 '오타쿠노믹스'가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대구 동성로에 최근 문을 연 애니메이션 굿즈샵 SMG굿즈스토어 내부. 조현희기자

이곳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자신을 '오타쿠'로 당당히 소개했다. 오타쿠라는 표현은 1990년대 PC통신 등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기존에는 아웃사이더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지만 현재는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친구들과 굿즈샵을 찾은 고등학교 2학년 최민준(16)군은 “과거엔 오타쿠라고 하면 숨기고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닌 것 같다"며 “반에서도 남녀 할 것 없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고, 이를 주제로 대화도 많이 나눈다"고 말했다. 직장인 박세영(27)씨도 “처음엔 애니메이션 보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면서도 “팬데믹 시기 집에서 심심해 OTT를 즐겨보다 애니메이션을 자연스레 접하게 됐다. 특정 캐릭터에 빠져 굿즈도 하나둘 사 모으기 시작했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오타쿠 경제학을 뜻하는 '오타쿠노믹스'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오타쿠들의 경제적 파급력이 주목받고 있는 것.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도쿄무역관은 일본의 오타쿠노믹스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1980년대에는 애니메이션·게임·만화 등 이질적인 취미를 가진 특이한 사람들로 치부됐던 '오타쿠' 용어가 40년이 지난 지금은 세대·성별에 관계없이 개인의 취향을 깊게 추구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고 밝혔다. 팬데믹 시기 자신의 취미에 집중할 기회가 생겼고, 여기에 자신만의 취향을 공유·과시하고 이에 관련된 소비에 주저하지 않는 MZ세대들이 유통업계 큰 손으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오타쿠 문화는 단순한 취향의 소비를 넘어 지역 상권에도 새로운 유입을 만들어내는 콘텐츠 산업이 되고 있다. 상인 A씨는 “최근 몇 년새 대구에 애니메이션 굿즈 상점이 정말 많이 생겼다. 예전엔 유동 인구가 패션이나 뷰티 쪽에 몰렸다면 요즘은 우리 쪽에도 많이 온다"며 “외지에서 오는 손님들도 계속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찰캉찰캉. 가챠 기계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는 동성로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는 소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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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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