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건축, 공간이 만든 세 개의 조각 언어…중견 작가 정광식·김상균·박선기 3인전

  • 권혁준
  • |
  • 입력 2026-06-02 22:15  |  발행일 2026-06-02
7월14일까지 021갤러리서 ‘Rippling Structures’ 전시
돌·콘크리트·합판 등 다양한 소재로 빚어낸 중견 조각가들의 작품 세계
정광식 작. <021갤러리 제공>

정광식 작. <021갤러리 제공>

전시장 입구에 서면 초록빛으로 가득한 숲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키 큰 침엽수들로 빼곡히 들어선 숲 앞에서 관람객은 자연스레 자신을 투영한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이 숲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매끈하게 절개된 돌 표면에 비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블록들이 정해진 규격의 틀 안에 불규칙하게 들어차 있다. 단순한 블록처럼 보이지만, 이 구조물들은 아치형 창 등 근대 건축물의 일부를 차용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싶지만 철거돼버린 건축물의 파편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검게 칠해진 2층 집도 눈길을 끈다. 부서진 2층의 창과 천장, 검은 외관은 마치 화재로 소실된 집을 연상시킨다. 집의 아래와 위, 왼쪽과 오른쪽을 살피다 보면 1층에 있는 작은 창이 눈에 들어온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면 창 속에서 다시 창을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1960년대 중반에 태어나 각기 다른 조각 작업을 이어온 중견 작가 정광식·김상균·박선기의 3인전 'Rippling Structures'가 오는 7월14일까지 021갤러리에서 열린다.


지난 5월29일 021갤러리에서 만난 정광식 작가는 작품을 봤을 때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힐링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권혁준기자 hyeokjun@yeongnam.com

지난 5월29일 021갤러리에서 만난 정광식 작가는 "작품을 봤을 때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힐링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권혁준기자 hyeokjun@yeongnam.com

◆돌에 새긴 숲과 바다, 철학적 사유


정광식의 작업은 반복된 행위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돌 표면을 깎고 색을 덧입히는 행위가 켜켜이 쌓이면서 숲과 바다, 도시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정 작가의 작품은 주로 푸른빛을 띤다. 작가는 돌 표면에 색을 수십 차례 덧발라 원근과 깊이를 표현한다. 지난달 29일 021갤러리에서 만난 정 작가는 "안토니 가우디는 색을 쓰지 않는 것은 신이 준 축복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며 "20번 이상 색을 칠하는데, 한지에 먹을 먹이듯 천천히 스며들도록 반복해서 색을 입힌다"고 말했다.


정 작가의 작품 앞에서 관람객은 숲과 바다, 도시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안에는 작가가 오랜 시간 돌을 마주하며 쌓아온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


정 작가는 "직관을 통해 본질을 찾아가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40년간 돌을 깎다 보니 이 돌 안에 우주의 근본적인 물질이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숲을 보면 관람객이 비치는데, 이는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을 견주어 보는 경험이다. 우리가 작품을 보는 이유는 결국 작품을 통해서 나를 되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균 작. <021갤러리 제공>

김상균 작. <021갤러리 제공>

◆블랙 레거시, 사라진 건축의 기억


김상균의 조각은 근대 건축물의 장식과 외벽, 즉 파사드를 콘크리트 블록 형태로 재구성한다. 비슷한 형태의 블록들이 반복되지만, 배열과 간격은 조금씩 어긋나 있다.


지난 5월29일 021갤러리에서 만난 김상균 작가는 우리가 지내고 있는 세대와 시간을 기록한다는 맥락에서 작품을 봐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권혁준기자 hyeokjun@yeongnam.com

지난 5월29일 021갤러리에서 만난 김상균 작가는 "우리가 지내고 있는 세대와 시간을 기록한다는 맥락에서 작품을 봐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권혁준기자 hyeokjun@yeongnam.com

김 작가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접어들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권이 식민 지배를 받았다. 당시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세운 서울역, 조선총독부 등의 건물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을 구분하는 하나의 헤게모니의 표상이라고 봤다"며 "그 건물들의 파사드를 재현해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건축물들은 그 시대에 가졌던 권력을 잃고 지금은 근대 문화유산이나 관광지가 됐다"며 "본래의 목적은 숨겨지고 겉에 드러난 표면의 장식만 남은 상황을 작품에 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작업은 김 작가가 자신이 살아온 공간을 읽는 데서 출발했다. 조각은 그에게 도시와 시간, 기억을 기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김 작가는 "1960년대 중반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이 변화되는 과정을 봐왔다. 이후 해외여행과 유학을 통해 런던, 베를린, 뉴욕, 로스앤젤레스를 봤는데, 그 도시들은 역사와 기억, 서사가 있는 시간을 갖고 있었다"면서 "서울은 700년 이상 된 도시인데도 돌아와 보니 관광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가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선기 작. <021갤러리 제공>

박선기 작. <021갤러리 제공>

◆시선으로 완성되는 공간


박선기의 작업에서 구조는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에 가깝다. 관람자가 움직이는 위치에 따라 형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작품의 내부와 외부도 다르게 읽힌다.


이소영 021갤러리 대표는 "박선기 작가는 거대한 작품을 주로 선보여왔지만, 이번 전시를 위해 소품을 내줬다"며 "연필로 빽빽하게 칠한 합판으로 만든 집은 박 작가가 공간의 대가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검은 집 내부의 계단은 그림자를 통해 한 방향으로 올라가는 느낌을 준다. 또 작은 창 안에는 거울이 설치돼 관람자가 창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눈동자만 보이도록 구성됐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의 시선이 다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구조다.


이번 전시에선 박 작가의 슬라이스 작업도 볼 수 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잘라 재구성한 작품은 관람자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이 대표는 "반복 속의 작은 차이에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부분을 통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업으로 읽힌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대표는 "이번 전시는 완결된 형상이 아니라, 형상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해체되는 과정에 대한 전시"라며 "조각을 하나의 결과로 보는 대신, 지속되는 상태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물질과 시간 속에서 남겨지는 구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자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기자 이미지

권혁준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생활/문화인기뉴스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