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촬영한 경주 동천동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 안 문화유적 전시공간에 보존된 통일신라시대 우물 유적. 이 일대 발굴조사에서는 우물 40기를 비롯해 도로와 건물지, 생산시설 등이 확인됐다. <장성재 기자>
자전거를 타고 동천동 푸르지오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우물을 찾는 일은 낯설다. 놀이터나 주차장도 아닌, 단지 한쪽 유리벽 앞에서 페달을 멈췄다.
유리 너머로 둥글게 쌓인 돌벽이 땅속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한때 신라 사람들이 물을 길었을 통일신라시대 우물이다.
평범한 아파트 안에 천년 전 우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묘한 느낌을 줬다. 주민들은 출퇴근길에 이곳을 지나고 외부 손님들은 단지를 찾았다가 우연히 유리벽 안 돌우물과 마주친다. 고분이나 절터처럼 따로 떨어진 유적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사는 공간 한가운데 남은 신라의 생활 흔적이다.
백률로 7번지의 아파트 단지 후문쪽 문화유적 전시공간에는 발굴 당시 확인된 우물 단면이 복원돼 있다. 단지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2006년 1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조사에서는 우물 40기를 비롯해 도로와 건물지, 생산시설 등이 확인됐다.
전시된 우물은 약 4m 깊이의 통일신라시대 우물이다. 돌을 쌓기 전 바닥에 나무 구조물을 만든 점도 특징이다. 물길이 무너지지 않도록 바닥부터 다진 흔적이다. 지금의 아파트 상하수도 시설처럼 당시 사람들에게도 물은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동천(東川)이라는 지명도 동천 주위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점도 있지만 좋은 샘이 있어 동천(東泉)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아파트 주민 최모씨는 "사람들이 전시된 우물을 보러 찾아보는 편은 아니다"면서도 "아파트에 왔다가 발견하면 신기해한다. 아파트 안에 이렇게 유적을 전시해 놓은 곳은 전국적으로 보기가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인근 주택가의 주민 유모씨는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곳이 군부대 자리였다"며 "이걸 치우지 않고 그 자리에 신라시대 우물이 남아 있다는 점이 더 신기하다"고 했다.
경주 동천동 선주길7번길 주택가 골목에 철문으로 보호된 돌우물이 남아 있다. 주민들은 상수도 보급 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이용한 공동 우물로 기억하고 있다. <장성재 기자>
유리벽 안 우물을 뒤로하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는 동천동 선주길7번길이었다. 넓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우물의 풍경은 전혀 달라졌다.
오래된 주택 담벼락 옆, 철문과 자물쇠 뒤에 낮은 돌우물이 남아 있었다. 유리벽 안 전시물처럼 정돈된 모습은 아니었다. 우물 옆에는 생활용품이 놓여 있었고 돌벽에는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박물관 속 유물보다 지금도 골목의 일부로 버티는 우물에 가까웠다.
선주길 주민 박모씨는 "아주 오래전, 조선시대부터 쓰이던 우물로 들었다"며 "상수도가 잘돼 지금은 우물을 쓸 일이 없지만 옛날에는 이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쓰던 귀중한 우물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도 우물 안에 물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썼다'는 말에는 지금과 다른 생활 풍경이 담겨 있다. 물지게를 지고 나온 이웃이 마주쳤고 집안일과 동네 소식이 오갔을 자리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곧바로 물이 나오는 시대에는 좀처럼 떠올리기 어려운 장면이다.
경주시청에서 34년간 공직 생활을 한 박원철 경주시종합자원봉사센터장은 도시 개발 뒤에도 우물이 남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박 센터장은 "개발을 하면 우물을 메우는 쪽이 훨씬 편하다"며 "하지만 물이 좋거나 마을의 유래가 있거나, 주민들이 오래 기억하는 우물은 남겨두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아 있는 우물에는 저마다 사정이 있다"며 "마을과 친화적인 요소가 있거나 역사성이 있는 경우, 주민들이 없애지 않고 지켜온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경주의 우물이 모두 신라시대 유물인 것은 아니다. 조철제 전 경주문화원장은 "신라시대 우물도 있고 조선시대 우물도 있다"며 "경주에는 시대별로 여러 형태의 우물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조 원장이 들려준 경주의 우물 이야기는 흥미롭다. 조 원장은 "옛 자료를 보면 경주읍성 안에 우물이 83곳이나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며 "한 차례 조사에서 50여 곳의 흔적을 확인했지만, 나머지는 끝내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주에 우물이 많았던 이유로는 지형이 꼽힌다. 북천과 남천 등 하천이 도시 주변을 흐르고 모래층 아래로 물길이 형성돼 있어 땅을 파면 물이 나는 곳이 적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조 원장은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경주는 땅을 파면 모래가 나오고, 그 아래에 샘물이 난다는 표현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북천은 지금보다 하천 바닥이 높았고 옛 읍성의 해자에도 북천 물을 끌어 썼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우물은 도시의 풍요를 보여주는 시설이면서 집안 형편을 가르는 생활 기반이기도 했다.
조 원장은 "잘사는 집에는 개인 우물이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주민들은 공동 우물을 함께 썼다"며 "집에 우물이 없으면 물지게를 지고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지금 수도꼭지가 생명줄이라면 예전에는 우물이 생명수였다"고 말했다.
그는 경주고등학교 교정 안에도 한때 우물 세 기가 있었고, 학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인근 주민들이 함께 쓴 우물로 전해진다고 소개했다. 탑동의 나정과 교동의 재매정, 오릉의 알영정, 기림사의 오종수도 경주의 물길을 따라가 볼 만한 곳으로 꼽았다. 특히 기림사에는 우물이 다섯 개 있었고, 물맛도 서로 달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앞에 남아 있는 분황사 석정. 외부는 팔각형, 내부는 원형인 신라시대 돌우물로 '호국용변어정'으로도 불린다. <장성재 기자>
선주길을 벗어나 분황로 94-11의 분황사에 도착하자 우물의 의미는 다시 달라졌다. 분황사 석정은 생활을 넘어 신앙과 설화, 그리고 사찰의 아픈 기억까지 품고 있었다.
분황사 모전석탑 앞에는 낮고 넓은 돌우물이 남아 있다. 이름은 '분황사 석정'이다. 신라시대 우물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물고기로 변한 우물'이라는 뜻의 '호국용변어정'으로도 부른다.
돌 높이는 약 70㎝다. 바깥은 팔각형, 안쪽은 원형으로 만들었다. 이 구조는 모든 것이 서로 막힘없이 어우러진다는 원융무애와 불교의 팔정도를 상징한다.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돌우물 가운데 규모가 크고 보존 상태가 좋아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양호하다고 한다.
분황사 석정에는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동천사의 동지·청지라는 우물에는 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 용이 살았다고 한다.
원성왕 11년인 795년, 당나라 사신이 주술을 부려 세 용을 물고기로 바꿔 잡아갔다. 용들의 아내라는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남편을 찾아달라고 호소했고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찾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게 했다. 그러자 물이 한 길이나 솟아오르고 용들이 기뻐 뛰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당나라 사람들이 왕의 밝은 지혜에 감복했다는 이야기도 이어진다.
그러나 이 우물에는 화려한 설화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분황사에 있던 돌부처들의 목을 잘라 이곳에 넣었다는 아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호국의 전설을 품은 우물이 한편으로는 불교 문화재 훼손의 기억까지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동천동 푸르지오의 유리벽 안 우물, 선주길 철문 뒤 공동 우물, 분황사 모전석탑 앞 석정까지. 페달을 밟은 이동거리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우물 앞에서 멈춰 사진을 찍고, 주민의 기억을 듣고 사찰의 설화를 따라가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수도꼭지 하나만 돌리면 물이 나오는 지금도 경주의 골목과 사찰에는 오래된 물길이 남아 있다. 우물은 사라진 생활도구가 아니라 이 도시 사람들이 어디서 물을 얻고 누구와 나눴으며 무엇을 믿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입구였다.
장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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