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6년 회령·종성서 북방 세력 물리친 공으로 세조가 하사
금도금 용머리·상아·은선 장식…조선 전기 왕실 공예의 정수
은잔은 6·25전쟁 때 도난, 옥피리는 예천으로…패도는 영주 종가에 전승
장말손 패도는 560년 전 조선 왕실의 권위와 당대 최고의 공예 기술이 담겨 있다. <영주시 제공>
흰 장갑 위에 놓인 칼은 성인 손바닥에 들어올 만큼 작다. 보존처리 과정에서 측정한 전체 길이는 14.2㎝, 너비는 2.3㎝에 불과하다. 그러나 금빛 용이 꿈틀거리는 칼자루와 은선을 촘촘하게 감은 칼집에는 560년 전 조선 왕실의 권위와 당대 최고의 공예 기술이 담겨 있다.
경북 영주IC에서 약 500m를 이동하면 장수면 화기리 인동 장씨 종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장말손 패도(佩刀)'를 만날 수 있다. 사공정길 영주시 학예연구사는 이 패도가 "전장에서 사용한 장검이 아니라 평상복 허리춤에 차던 소형 칼인 '도자(刀子)'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크기는 작지만 세조가 신하의 공을 인정해 직접 내린 왕실 하사품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장말손(1431~1486)은 1459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감찰과 함길도평사 등을 지낸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종가 기록인 '추원록'에 따르면 장말손은 1466년 함경도 회령과 종성 일대에서 당시 '야인'으로 불리던 북방 세력을 물리친 공을 세웠다. 세조는 포상으로 패도와 옥피리 1정, 은잔 1쌍을 내렸다.
장말손은 이듬해인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도 참여해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됐다. 사공 학예사는 "패도를 이시애의 난과 연결하는 경우가 있지만, 패도는 그보다 1년 앞선 1466년 북방 전공으로 받은 물건이어서 두 사건을 구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장말손 유품'은 이 패도와 적개공신회맹록 등 2종 2점으로 구성돼 있다.
패도의 가치는 화려한 장식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칼자루는 구리로 용머리를 주조한 뒤 금으로 도금했다. 입을 벌린 용의 머리 양쪽에는 거북과 국화를 돋을새김하고, 윗부분에는 용의 비늘을 새겼다. 빈 공간은 작은 알을 촘촘하게 찍은 듯한 어자문(魚子文)으로 채웠다.
장말손 패도는 첨자가 장식된 조선 전기 패도로는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사례이다. <영주시 제공>
칼집의 제작 방식도 독특하다. 여러 목재 조각을 이어 만든 몸체에 얇게 자른 가죽을 아교로 붙이고, 입구에는 당시 전량을 외국에서 들여와야 했던 상아를 사용했다. 상아 장식은 굵은 은선 세 겹으로 고정했다. 칼집 전체에는 다시 은선 두 겹을 일정한 간격으로 네 차례 감고, 그 사이에 고리가 달린 긴 첨자(籤子)를 끼웠다. 첨자가 장식된 조선 전기 패도로는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사례다.
종가의 '추원록'은 칼집을 대나무 껍질로 만들었다고 기록했지만, 정밀 보존처리에서는 목재와 얇은 가죽을 겹친 구조가 확인됐다. 사공 연구사는 "대대로 전해진 문헌 기록과 과학적인 재질 조사를 함께 살펴야 유물의 원래 제작 방식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패도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금도금 일부가 부식되고 상아로 만든 칼집 입구가 절단됐다. 목재 칼집도 변색되고 뒤틀렸지만 2017년 보존처리를 통해 남아 있는 형태와 재료를 안정화했다. 종가 기록과 실물이 함께 남아 있어 훼손 이전의 모습까지 추정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세조가 함께 내린 하사품은 서로 다른 운명을 맞았다. 은잔 한 쌍은 6·25전쟁 때 도난당했고, 옥피리는 혼인을 통해 장말손의 사위 박인량과 다시 권오상에게 전해져 현재 예천 용문면 초간 권문해 종택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졌다. 패도는 영주에 남아 장말손 가문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칼이지만 그 안에는 북방 개척과 왕의 포상, 왕실 공예, 종가의 전승사가 겹겹이 새겨져 있다. 장말손 패도는 무기가 아니라 조선이 공을 기록하고 기억한 방식까지 보여주는 '560년 전 훈장'인 셈이다.
권기웅
어려운 사실은 쉽게, 불편한 진실은 날카롭게 전하겠습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