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뫼의 음유시인(音流示人)] 예술성이냐, 대중성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강한뫼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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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8-27 18:39  |  발행일 2026-08-28

음유시인(音流示人). 음악을 흘려 당신을 봅니다. 음악이 우리 삶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소리 너머에 있는 인간의 감정과 시대를 살펴봅니다.


지브리 음악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작곡가 히사이시 조. 넷마블 제공

지브리 음악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작곡가 히사이시 조. 넷마블 제공

한때 예술성과 대중성을 놓고 마치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느끼곤 했다. 예술성을 택하면 대중과 멀어질까 염려되고, 대중성을 택하면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을 상실할 것 같은 불안감 말이다. 아마도 많은 예술가가 한 번쯤은 마주하는 오래된 양자택일의 딜레마일 것이다.


그런데 스튜디오 지브리의 음악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 히사이시 조의 한 문장을 만난 뒤, 이 질문의 한쪽이 뜻밖에 명확해졌다. "상업적인 예술이라고 해서 예술적인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상업성과 예술성을 엄격하게 나눠 세우던 필자의 생각이 멈춰섰다.


누구의 의뢰로 시작했든, 어떤 목적을 달고 있든,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판단과 선택이 개입한다. 예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색하고 고민하는 일이며, 예술성은 그 행위 안에서 처음부터 존재한다. 그러니 작품이 지닌 예술성의 깊이와 밀도는 논할 수 있을지언정, 예술성의 유무를 판정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때부터 예술성은 필자에게 더 이상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매 순간 얼마나 깊이 사색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것을 얼마나 충실하게 밀고 나갈 것인가. 이것이 유일한 문제였다.


◆대중성을 다시 묻다


그렇다면 '대중성'이란 무엇인가. 음악에서 대중성은 흔히 익숙한 화성과 기억하기 쉬운 선율 같은 특징으로 설명된다. 실제로 작곡가들 사이에는 대중적인 음악을 위한 문법이라 불리는 것이 통용되고, 그 밑바탕에는 '대중은 익숙하고 쉬운 음악을 좋아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물론 그러한 문법은 유효하다. 익숙함은 사람들의 귀를 열고 작품에 다가서게 하는 좋은 통로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문법을 하나의 공식으로 굳혀, 대중이 언제나 쉽고 익숙한 음악만을 원한다고 단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렇게 하니 먹히더라'라는 경험을 대중의 보편적인 소비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그 기준에 따라 이후의 창작마저 정형화하는 것이다.


대중성을 특정한 음악 문법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도리어 대중을 과소평가하는 일이다. 창작자가 대중의 수준과 취향을 미리 가정하는 순간, 예술가와 대중 사이에 존재할 수많은 가능성은 하나의 기호(嗜好)로 축소된다. 이는 창작자가 대중성을 오독한 결과다. 그 오독은 사색과 고민의 범위를 미리 제한하고, 결국 창작자 자신의 안목과 가능성에도 굴레를 씌운다.


대중은 하나의 절대적인 집단이 아니다. 저마다 살아온 시간과 경험만큼 서로 다른 취향을 지닌 사람들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누군가는 익숙한 선율에서 위안을 얻고, 누군가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에 마음이 움직인다. 이 모두가 대중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취향으로 규정할 수 없으니, 대중성을 작품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정된 성질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대중성은 작품이 얼마나 쉽고 익숙한가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 작품이 사람들과 어떤 접점을 만들고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에 가깝다.


소위 '특색'이 먹혀야 살아남는 판이다. 그 특색은 운 좋게 자신이 사는 시대와 맞물릴 수도 있고, 한참 뒤에야 조명될 수도 있다. 시대의 흐름을 감지할 수는 있어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창작자가 형체도 없는 대중의 관심을 좇아 자신을 계속 바꾸어 맞춘들, 세상의 취향은 곧 다시 변할 것이다. 그때마다 또 자신을 바꾸어야 할까.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녁을 따라 달리는 일에는 끝이 없다.


그렇다면 변화하는 대중의 기호에 자신을 거듭 맞추기보다, 쉽게 변하지 않을 자기 것을 지키고 성장시키는 편이 오히려 현명하지 않을까. 필자에게 대중성이란 자기 세계의 방향을 타인의 취향에 내맡기지 않으면서도, 그 고유함을 기꺼이 취향으로 삼을 자들을 찾고, 더 많은 이가 그 세계에 닿도록 길을 내는 일이다.


그 길은 때로 익숙한 화성과 쉬운 선율을 활용해 작품 안에 마련하는 일일 수도 있고, 라디오와 칼럼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악 밖에 놓을 수도 있다. 곧 작품 안의 선택부터 작품 밖의 소통까지, 자신의 음악이 타인과 관계 맺을 가능성을 넓혀가는 전방위적인 고민이다.


음악은 더 이상 예술성과 대중성 둘 중 무엇을 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음악은 더 이상 예술성과 대중성 둘 중 무엇을 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예술가와 대중의 공생


예술가는 사람들이 이미 반응하고 있는 것을 되풀이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익숙한 아름다움은 사람들에게 쉬이 선택받겠지만, 이미 정형화된 것을 반복하는 일만으로는 새로운 감각과 관점이 태어나기 어렵다. 고로 한 시대의 예술 역시 정체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한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 예술가다. 모름지기 음악가는 소리를 다루는 사람이기 이전에, 세상을 남다르게 보고 들으며 그 감각을 작품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작곡가가 자신의 시선을 작품으로 건네면 사람들은 저마다 경험과 감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예술가는 그 반응을 통해 다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그렇다고 예술가가 대중을 가르치거나 일방적으로 앞에서 이끌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공생이다. 예술가와 대중이 서로의 감각을 움직이며, 한 시대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범위를 함께 넓혀가는 관계다. 예술가가 대중을 쉽고 익숙한 것만을 원하는 집단으로 규정한다면, 그들에게 건네는 예술뿐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가능성 역시 그 정도에 머물고 만다. 예술가가 대중의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예술가 개인과 한 시대의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도 달라진다.


예술성이냐, 대중성이냐. 더 이상 둘 중 무엇을 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두 가지 책임을 모든 작품 안에서 함께 성취해내야만 할 문제다. 예술성은 자기 세계를 얼마나 깊고 충실하게 밀고 나가는가에 대한 작가적 태도이며, 대중성은 그 세계가 타인에게 닿을 길을 마련하는 방식이다.


필자는 작곡가로 살아간다. 이는 곧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작품은 타인을 향하는 동시에 필자 자신을 위한다. 작품에는 의뢰인의 기대와 충족해야 할 조건이 있다. 그러나 오직 그 요구를 만족시키는 데에만 머문다면 작곡가 자신의 사색과 고민이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동일한 창작의 시간 안에서 의뢰인을 위한 음악인 동시에 예술가 자신의 실험과 성장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의뢰의 목적을 존중함으로써 타인을 향한 책임을 다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자기만의 세계를 풀어내야 한다. 대중성과 예술성은 바로 그곳에서 병존한다.


예술이 저마다의 고유함을 지닌 채 자기답게 존재하면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닿도록 하는 것. 세상이 아직 만나지 못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그 만남이 동시대와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을 이전과 다른 곳으로 데려가도록 하는 것.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음악 안팎의 모든 순간에 이를 함께 감당하는 일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시선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동시대의 대중에게 건넬 길을 포기하지 않을 때, 한 시대가 함께 향유하는 미학 또한 이전보다 한층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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