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다, 경주의 동해⑤] 탈해왕의 바다

  • 이지용·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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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9-17 19:00  |  발행일 2026-09-18
새로운 바다 맞이한 신…王이 된 낯선 이 ‘석탈해’
삼국유사는 계림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서 아진의선이 바다에 떠온 배를 발견하고, 궤 속 아이를 거두었다고 전한다. 탈해왕의 설화벽화가 그려진 경주 양남 죽전항 방파제 위에 설치된 청룡등대.

'삼국유사'는 계림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서 아진의선이 바다에 떠온 배를 발견하고, 궤 속 아이를 거두었다고 전한다. 탈해왕의 설화벽화가 그려진 경주 양남 죽전항 방파제 위에 설치된 청룡등대.

알에서 태어나 궤에 담긴 채 바다로

낯선 배 발견한 여인이 정성껏 키워

기지와 비범함으로 신라 4대 왕 올라

바다 밖 낯선 존재가 기반 닦는 과정

신라 초기 개방적인 역사 모습 그려

탄강유허·나아해변서 서사 떠올려

신라는 한 왕을 바다로 떠나보내기 오래전, 바다에서 한 왕을 받아들였다.


이곳은 경주시 양남면 나아해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한 아이의 이야기가 남아있는 곳이다. 알에서 태어나 큰 궤에 실려 낯선 포구에 닿은 아이, 훗날 신라 제4대 왕이 되는 석탈해(昔脫解)다. 그가 태어난 나라가 어디인지, 바다를 건너온 과정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두 기록은 서로 다른 이름과 장면을 전한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 바다에서 온 아이를 누군가 발견했고, 누군가 그 궤를 열어 아이를 세상 밖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문무왕의 수중릉이 왕을 바다로 보내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을 품었다면, 이곳 나아의 바다는 그보다 훨씬 앞서 한 아이를 육지로 들여보낸 바다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바다가 데려온 아이를 외면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탈해왕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석탈해의 탄강설화를 주제로 조성된 탈해왕길은 읍천항에서 나아해변으로 이어진다. 길을 따라가면 궤가 실린 배와 노파, 까치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송림 산책로가 나타난다. 경주시는 노후 시설을 정비하기 위한 탈해왕길 리뉴얼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석탈해의 탄강설화를 주제로 조성된 탈해왕길은 읍천항에서 나아해변으로 이어진다. 길을 따라가면 궤가 실린 배와 노파, 까치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송림 산책로가 나타난다. 경주시는 노후 시설을 정비하기 위한 탈해왕길 리뉴얼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먼 바다에서 온 궤


파도가 물러난 자리마다 젖은 모래가 어두운 빛을 띠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시작된 물결은 해변 가까이 다가와 몸을 낮추고, 얇고 긴 포말을 남긴 뒤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오래전, 이 물결 위로 배 한 척이 흘러들었다고 이야기는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는 왜국 동북쪽 1천 리에 있었다는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 왕이 여국 왕의 딸을 왕비로 맞았는데, 왕비는 임신한 지 7년 만에 커다란 알을 낳았다.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을 상서롭지 못하게 여긴 왕은 알을 버리라고 명했고,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 왕비는 알을 비단으로 싸 보물과 함께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궤는 처음 금관국 해안에 닿았지만 그곳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물길에 실린 궤는 바다를 정처 없이 떠돌다가 신라 시조 혁거세 때 진한의 아진포에 도착했다.


한편,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더 많은 빛깔을 품고 있다. 탈해는 자신이 용성국 왕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알에서 태어난 까닭에 궤에 담겨 바다로 보내졌고, 붉은 용의 호위를 받아 가락국을 거쳐 계림 동쪽 하서지촌의 아진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배 위에는 까치들이 모여 울고 있었다.


두 기록의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태어난 나라는 다파나국과 용성국으로 갈리고, 바다를 건너온 과정에도 차이가 있다. 기록 속 연대와 지명을 오늘의 지도 위에 그대로 옮기는 일도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알과 궤, 까치와 용이라는 상징 속에 바다에서 건너온 존재가 신라 사회로 들어오는 과정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탈해라는 이름도 바다를 건너온 궤와 이어진다. '탈(脫)'에는 벗어나다, 빠져나오다라는 뜻이 있고, '해(解)'에는 묶이거나 닫힌 것을 풀다라는 뜻이 있다. 바다 위 닫힌 궤에서 나와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순간이 그대로 이름이 됐다.


석씨 성 역시 궤를 따라온 까치와 연결된다. 까치 작(鵲) 자에서 새 조(鳥) 자를 덜어내 석(昔)을 성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한 사람의 성과 이름에 까치가 울던 배와 열린 궤, 바다에서 육지로 나온 첫 순간이 함께 새겨진 셈이다.


석탈해왕 탄강설화를 테마로 한 조형물이 경주 읍천항과 죽전항 사이에 있다.

석탈해왕 탄강설화를 테마로 한 조형물이 경주 읍천항과 죽전항 사이에 있다.

◆궤를 연 사람, 아진의선


석탈해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대개 알에서 태어난 왕자와 바다를 건너온 궤에 돌아간다. 궤에서 나온 아이가 훗날 왕이 되는 과정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아의 바닷가에 오래 서 있자니, 이곳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다 낯선 배를 처음 발견했을 사람이 떠올랐다.


'삼국사기'는 그를 '바닷가의 할멈'으로 기록한다. 할멈은 배를 줄로 끌어당겨 바닷가에 매어 두고 궤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는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삼국유사'는 그에게 '아진의선'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아진포에 있던 아진의선은 전에 없던 바위가 바다에 생긴 듯 까치들이 모여 우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이 바다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까치가 모여 우는가' 하고 가까이 가보니 바위처럼 보였던 것은 낯선 배였다. 아진의선은 배를 끌어 숲 아래에 매어 두고 하늘에 고한 뒤 궤를 열었다. 그 안에는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와 일곱 가지 보물, 노비들이 있었다. 아진의선은 아이를 이레 동안 정성껏 대접했다. 그제야 아이는 자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를 이야기했다.


기록은 짧지만 그 짧은 기록 속에는 한 아이의 삶을 바꾼 몇 번의 선택이 놓여 있다. 이상한 배를 보고도 돌아서지 않은 일, 배를 물가로 끌어온 일, 길흉을 알 수 없는 궤를 연 일, 낯선 아이에게 먹을 것과 머물 곳을 내준 일이다.


나아의 해안을 따라 난 탈해왕길에 서서 아진의선이 바라봤을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려보았다. 수면 위로 햇빛이 흔들리고, 멀리 있던 파도 하나가 점점 모습을 키우며 해변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배도 궤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던 수평선에 낯선 물체 하나가 나타나는 순간은 상상해볼 수 있었다.


아진의선은 그 배에 무엇이 실렸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가 장차 왕이 되리라는 것도 알 수 없었다. 그가 먼저 알아본 것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평소와 달라진 바다였다. 파도는 아이를 해안까지 데려왔을 뿐이다. 아이의 긴 항해는 아진의선이 바다를 바라보고, 배를 끌어당기고, 마침내 궤를 열었을 때 완성됐다.


석탈해왕 탄강유허 옆에 있는 하마비. 조선 헌종 11년인 1845년 이곳에 하마비와 땅이 내려졌고, 고종 초에는 석씨 문중이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다.

석탈해왕 탄강유허 옆에 있는 하마비. 조선 헌종 11년인 1845년 이곳에 하마비와 땅이 내려졌고, 고종 초에는 석씨 문중이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다.

◆왕으로 가는 길


아진의선이 거둬 기른 아이는 자라 고기잡이로 어머니를 봉양했다. '삼국사기'는 탈해가 한 번도 게으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노파는 그의 골상이 남다른 것을 알아보고 학문을 익혀 공과 이름을 세우라고 권했다. 탈해는 학문에 힘썼고 땅의 이치에도 밝아졌다. 그는 양산 아래에 있던 호공의 집터를 보고 살 만한 길지라고 판단했다. 이곳은 훗날 신라의 왕궁이 들어선 월성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탈해가 그 집을 차지한 과정이 더 자세히 나온다. 탈해는 호공의 집 근처에 숯과 숫돌을 몰래 묻은 뒤 관가를 찾아갔다.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다른 고을에 간 사이 호공이 집을 차지했다고 주장했다. 관가에서 증거를 요구하자 그는 땅을 파보라고 했다. 미리 묻어둔 숯과 숫돌이 나오면서 탈해의 주장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호공의 집을 차지했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남의 집을 빼앗기 위한 속임수다. 그러나 설화는 이 일을 탈해의 기지와 비범함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전한다. 기존 세력을 상징하는 호공과 벌인 지혜 겨루기이자, 바다 밖에서 온 탈해가 신라 왕경 안에 자신의 자리를 얻는 과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숯과 숫돌 또한 단순한 속임수의 도구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탈해가 자신의 조상을 대장장이라고 내세운 점에 주목해, 그와 함께 신라로 들어온 집단이 철을 다루는 기술과 관계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견해가 있다. 고대사회에서 철은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고 생산력과 군사력을 높이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철을 다루는 능력은 새로운 기술인 동시에 새로운 힘이었다.


호공의 집을 차지한 일은 탈해가 신라 왕실로 들어가는 계기가 됐다. 남해왕은 그의 현명함을 듣고 재위 5년인 서기 8년에 맏딸과 혼인시켰다. 바다 밖에서 온 인물이 박씨 왕실의 사위가 된 것이다. 2년 뒤 탈해는 대보에 올라 나라의 정사를 맡았다.


남해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유리는 덕망이 높은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다. 탈해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는 옛말을 들어 떡을 깨물어보자고 했다. 두 사람이 남긴 잇금을 헤아린 결과 유리의 이가 더 많았고, 유리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임금의 칭호인 '이사금'이 잇금, 곧 치아 자국에서 비롯됐다는 전승도 이 이야기와 함께 전한다.


유리왕을 이어 왕이 된 탈해의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궤가 등장한다. 재위 9년인 서기 65년, 금성 서쪽 시림의 나뭇가지에 황금 궤가 걸리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었다. 호공의 보고를 받은 탈해는 궤를 가져오게 해 열었다. 그 안에는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는 하늘이 자신에게 아들을 내려준 것이라며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훗날 신라 김씨 왕통의 시조가 되는 김알지다.


한때 바다에서 온 궤 안에 누워 있던 아이가 왕이 된 뒤에는 다시 다른 궤를 열어 한 아이를 나라 안으로 받아들였다. 아진포에서 자신에게 열렸던 문을, 훗날 자신도 누군가에게 열어준 셈이다.


경주 양남면 나아리에 자리한 석탈해왕 탄강유허. 석탈해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 땅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는 전승을 기리는 곳으로, 1988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경주 양남면 나아리에 자리한 석탈해왕 탄강유허. 석탈해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 땅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는 전승을 기리는 곳으로, 1988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신라 제4대 왕인 탈해왕이 출현했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경주 석탈해왕 탄강유허비.

신라 제4대 왕인 탈해왕이 출현했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경주 석탈해왕 탄강유허비.

◆탄강유허, 첫 순간을 기억하는 자리


나아해변에서 내륙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바다는 낮은 지붕과 나무 뒤로 차츰 가려졌다. 해변을 떠난 지 오래지 않아 '석탈해왕 탄강유허'에 닿았다.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이곳은 석탈해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 땅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는 전승을 기념한다. '탄강'은 귀한 사람이 태어나거나 세상에 내려왔다는 뜻이다. 석탈해가 이곳에서 육신으로 태어났다는 의미라기보다,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신라의 역사 속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사건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유허'라는 말도 눈길을 붙든다. 옛일이 있었던 터. 왕궁이나 무덤처럼 한 사람의 생애가 완결된 장소가 아니라, 한 존재가 처음 도착한 순간을 기억하는 자리다. 아직 왕이 되기 전, 이름조차 얻기 전의 시간을 품고 있다.


조선 헌종 11년인 1845년, 조정은 이곳을 아진포로 비정해 하마비와 땅을 내렸다. 이후 고종 초 석씨 문중이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고, 비문은 이종상이 지었다. 1988년에는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석탈해 설화는 신라의 시작이 하나의 혈통과 한 방향에서만 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바다 밖에서 온 낯선 존재가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왕이 됐고, 그 왕은 훗날 황금 궤에서 나온 또 다른 아이를 받아들였다. 박·석·김 세 성씨가 왕위를 이어간 신라 초기의 역사는 서로 다른 존재와 집단이 신라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얻는 과정이기도 했다.


탄강유허를 나와 다시 해변으로 향했다. 한 아이를 실어 왔던 바다는 오래전 그날처럼, 다시 나아의 모래밭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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