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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가 청하현감 부임 첫해에 완성한 청하성읍도에 나오는 회화나무. 오백년 수령으로 아직까지 포항시 북구 청하면사무소 앞마당에 있다. |
Prologue
‘진경산수’는 가장 한국적인 우리 고유의 산수화풍이다. 조선시대, 중국화풍을 답습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의 멋과 아름다움을 직접 사생하며, 주자학적 자연관과 풍류를 묘사한 것이 ‘진경산수’다. 그러한 진경산수 화풍을 창시한 인물이 겸재 정선(1676~1759)이다. 특히 겸재는 그의 나이 58세 되던 1733년 이른 봄에 청하(지금의 포항시 청하면) 현감으로 부임해 1734년까지 머물렀다. 2년여 동안 청하에 머문 겸재는 내연산 등을 둘러본 뒤 ‘내연삼용추’ ‘내연산폭포도’ ‘고사의송관란도’ ‘청하성읍도’ 등의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겸재 특유의 도끼로 쪼는 듯한 필묵법이 나타난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겸재의 진경산수 화풍은 청하에서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진경산수의 산실이자 발현지가 포항인 것이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스토리텔링 시리즈 ‘청겸진경(淸謙眞景)의 비밀’을 연재한다. ‘청겸’은 ‘청하와 겸재’를 줄인 말이다. 여기에 ‘진경(진경산수)’을 연결시킨 합성어다. ‘청겸진경’이란 말은 앞으로 진경산수의 발현지가 포항임을 알리고, 브랜드화하는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다. ‘청겸진경의 비밀’은 청하에 2년여 동안 머물렀던 겸재의 이야기를 다룬다. 겸재가 진경산수를 꽃피우게 된 배경과 과정을 스토리에 상세하게 담아낼 예정이다. 1편 ‘청하읍성에 서서 해를 맞다’에서는 겸재가 청하현감으로 부임하게 된 배경과 청하읍성을 거닐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심화시키는 모습을 담았다. 작품에서 ‘선(敾)’이란 인물이 겸재 정선이다. 원고 집필은 스토리텔링 전문작가이자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의 초빙연구원인 이상국씨가 맡았다.
갑인년 새밝이었다. 새밝은 ‘새가 밝았다’는 것이니, 새벽의 원래 뜻이다. 새는 동쪽이다. 샛바람이 동풍인 것은 ‘새’라는 말이 동(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이 튼다는 것은 동쪽이 열린다는 것이다. 동남단(東南端) 청하. 동(東) 중의 동에서 밝 중의 밝을 보는 새밝. 차디찬 새벽어둠을 밀어내는 한 줄기 빛의 기운. 음(陰)의 절정에서 양(陽)은 실낱같은 기운을 내서 한 해의 심지를 돋운다.
선(敾)은 부옹루에 서 있었다. 동해에서 해가 끓어오르는 듯 하늘이 붉게 울먹거린다. 꿈틀꿈틀 생명같은 빛덩어리가 부화한다. 해문(海門)을 가리는 큰 소나무 수백 그루가 서 있는 봉송정 송림 솔잎 사이로 햇살들이 터져 들어온다. 선은 입을 굳게 다물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계축년 (1733) 6월에 발령을 받고 청하에 내려온지 여섯 달. 권문세족의 그림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여 붓과 종이를 놓을 새 없었던 한성의 생활이 벌써 아득하게 느껴진다. 조선 반도의 동쪽 끝, 백두(白頭) 큰 줄기의 자락에 서서 59년의 생을 돌아보듯 느긋한 기분으로 서 있다.
동쪽 끝으로 와서 돋는 해를 맞는다. 부옹루는 청하읍성의 동문(東門) 겸 정문이다. 이 작은 성은 지세(地勢) 때문에 남북으로는 문을 내지 못했다. 따라서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다. 부옹루는 세종 때 경상감사였던 홍여방(洪汝方)이 지은 누정(樓亭)으로, 그 이름도 그가 지었다. 홍여방도 바로 이 자리에서 바다가 토하는 듯한 붉은 첫 해를 만났으리라. 부옹은 주역에 나오는 말로, 제물로 바칠 포로가 건장한 것을 뜻한다. 하늘을 우러르는 경배의 마음이다. 선은 41세 때 관상감 천문학 겸교수(종6품)의 벼슬을 받아 일한 적이 있었다. 음직(蔭職)으로 벼슬을 나갈 경우엔 종9품부터 시작하는 것이 관례인데, 그는 파격적으로 바로 종6품직에 특채되었다. 화명(畵名)을 떨치며 지식인 사이에서 선풍을 일으킨 그에게 벼슬을 주어야 한다는 의논이 일었고, 그가 특히 ‘주역’에 능통하였기에 천문학 쪽의 일을 맡긴 것이었다. 그는 부옹문 아래서 일출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큰 운명의 기운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관아를 거닌다. 돌아서서 성읍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 동헌 쪽을 보니 건물 너머 진산(鎭山)인 호학산(呼鶴山)이 벌써 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청하읍성은 평지 구릉 위에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축조되었다. 그는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천천히 내아(內衙) 쪽으로 걷는다. 이곳은 그를 비롯해 관속들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내아 옆의 연못을 지나 동헌 뒤쪽으로 가면 서문(西門)이 있다. 부옹문 쪽이 에두르는 길인지라, 사실상 서문이 요즘은 정문처럼 쓰이고 있다. 서문 밖엔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동헌으로 쓰이는 칠정헌(七政軒)과 읍창(邑倉) 뒤편으로 걸어가며 정정한 회화나무 아래서 잠깐 머문다.
선은 왠지 이 나무가 의지목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이 나무를 그림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 차례 나무껍질을 어루만진 뒤 그는 시죽(矢竹·활대)으로 쓰이는 대숲이 늘어선 성벽을 따라 걷는다. 대숲은 관아 뒤에서부터 남쪽 성벽까지 돌아가며 둘러서 있다. 남쪽 한 켠에는 객사(客舍) 건물들이 있다. 그 중심에 있는 큰 누각은 해월루(海月樓)로, 청하읍성의 자랑거리다. 회재(이언적)의 기문이 있고, 청천 신유한(申維翰·1681~1752)이 다시 세우며 다시 기(記)를 남긴 누각이다. 청천은 그 시대 뛰어난 시인으로, 선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다섯살 아래인 청천(靑泉)은 나중에 다시 겸재와 만나는 인연이 있다. 8년 뒤인 1742년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하였을 때, 경기감사인 홍경보가 겸재와 함께 인근의 연천현감 신유한을 삭녕의 우화정으로 불러 당대 최고의 시화(詩畵) 뱃놀이를 벌인다. 이때 그린 그림이 ‘연강(蓮江)임술첩’이다.) 동헌의 건물들은 모두 남향이지만, 해월루는 동향으로 서 있다. 그 곁에 있는 객관은 덕성관(德城館)이다. 선은 다시 칠정헌 앞으로 와서 돋아오른 해를 보며 심호흡을 한다. ‘이제 나도 50대의 마지막 해를 맞았구나.’
영남의 끝자락.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선에게는 6년간의 영남시절이 이미 있었다. 1721년(경종 원년)부터 1726년(영조 2년)까지 하양현감으로 있었다. 하양(河陽)은 경북 경산지방이다. 선의 나이 46세 때 시작하여 51세 때까지였다. 그때 그는 영남산수의 진면목을 살짝 맛보았다. 37세 때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그렸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은 당시 조선을 매료시킨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훔치고 싶은 물건 제1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해악전신첩이라고 말하리라.
선은 부동의 스타가 되었다. 특히 김창집의 자제군관으로 따라간 김창업이 겸재의 그림을 중국 연경 화단의 감식안들에게 내놓았을 때, 그들은 당시 조선 최고 화가로 꼽히던 공재 윤두서의 그림보다 정선을 윗길로 쳤다. 공재는 이런 평가에 충격을 받고, 가세(家勢)가 기울었다는 이유를 대고 해남으로 낙향하기까지 한다. 이후 선은 조선 화단을 주도하는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그 이후인 하양현감 시절은 산수화의 변경을 영남까지 확대하는 일대 숙성의 시기였다. 이 시기를 ‘영남 하겸(河謙)시대’라고 부를만 했다.
이 무렵의 그는 지역의 실경을 사생하고 살피면서 금강산도에서 다하지 못했던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1722년엔 그가 어울리던 노론 세가의 자제들이 참화를 입는 임신사화가 일어났으나, 그는 변방에 있는 바람에 피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1725년 화가인 관아재 조영석의 형인 조영복이 경상감사로 내려온다. 선은 이 무렵 영남 66군현을 골골마다 훑으며 명승(名勝)을 스케치하는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그 결과로 남긴 것이 ‘영남첩(嶺南帖)’이다. 그가 한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예술군주 영조가 등극해 세자 때 스승이었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은 한성주부, 의금부도사로 임명된다. 영조는 14세 때 창의궁을 사저로 받은 뒤 겸재에게 그림을 배웠다. 왕이 된 뒤에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겸재’라고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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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읍성 복원도. 겸재의 작품 ‘청하성읍도’를 모델로 복원한 조감도다. |
선이 청하에 발령을 받게 된 것은 영조의 깊은 뜻이었다. 왕은 조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진경(眞景)의 문화를 뿌리내리기 위해 시화(詩畵)의 쌍벽이라 할 수 있는 사천 이병연과 겸재를 조선 최고의 명승지인 관동팔경 지역에 내려보낸다. 두 사람은 평생의 지기(知己)이며, 시와 그림의 호흡을 맞추는 환상의 콤비였다. 이병연은 삼척부사로 발령받았는데 떠나기도 전에 겸재에게 ‘대관령도’를 그려달라고 부탁해서 벽에 걸어놓고, 그곳에 갈 날만 기다렸다. 그는 청하로 떠나오기 직전까지도 서울의 많은 사람들에게 금강산과 북악산 그림들을 그려주고 있었다. 그가 그려주는 그림값은 대개 한성의 집 한 채 값의 절반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굳이 돈을 벌었던 것은 구십이 넘은 노모를 편히 봉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영남 작은 고을의 사또로 부임하면서 선은 비로소 한가함을 찾았다. 한가로이 뜻과 흥에 따라 그림을 그리면 그만이다. 요즘은 고요히 앉아 미친 듯 그렸던 그림들을 펼쳐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림이란 대체 무엇이던가.
작년 가을 선은 해월루에서 신유한과 술자리를 가졌다. 구면이었다. 1719년 한성, 영의정 김창집의 집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신유한은 일본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떠나기 전에 상공댁에 하직 인사를 하러온 것이었다. 선은 스승이었던 김창흡(창집의 아우)이 설악산에서 모처럼 귀경해 그곳에 머물러 있는 때였기에 그 댁을 드나들었다. 67세였던 김창흡은 39세인 신유한에게 정중히 시권(詩卷)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33세로 장원급제한 신유한은 한성에서도 명성을 지닌 빼어난 시인이었다.
김창흡은 유한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남에서 이미 명성이 자자한 사람으로, 이제 일본까지 그 향기가 미치겠구려. 천지가 동남쪽으로 기울어졌으니 그 문장은 굴원(屈原) 송옥(宋玉·두 사람은 고대 중국 초나라의 시인)의 여운을 지녔소.” 돌아가신 스승이 이토록 칭찬한 소객(騷客·시인)이니 선으로선 기억이 새로웠다. 그는 고령 사람이었으나, 청하에 자주 들렀다. 신유한이 청하읍성으로 선을 방문했을 때 일행이 있었다.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배움을 구하는 이 지역의 제자들이었다. 그 중에서 흥해 출신인 최천익(崔天翼)과 오두촌의 승려 오암(鰲巖·속명은 김하(金河))은 놀라운 인재들이었다. 스물네 살 동갑내기. 최천익은 경전과 역사를 줄줄 꿰는 박학다식이었고, 김하는 한 번 읽으면 모두 기억해 내는 일람첩기(一覽輒記)의 장기를 지녔다. (나중에 최천익은 일세를 풍미하는 시인이 되고, 김하는 서산대사의 법손(法孫)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된다.)
그리고 여인이 하나 있었다. 이름을 세오(細烏)라고 했다. 홀아버지 정해일(鄭海日)이 쇠도둑 누명을 쓰고 죽은 뒤 바닷일을 하며 홀로 살아가는 스물여덟 쯤 되는 사람으로, 선비처럼 밤낮으로 책을 읽고 사군자(四君子)를 치며 살아간다 하였다. 최천익과 함께 신유한의 가르침을 받는 동학(同學)이기도 했다. 눈이 맑고 콧매가 깨끗하여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있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신유한은 선에게 말했다.
“내,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어떤 일이오? 그림이라면 어렵지 않소이다만…”
“겸옹(謙翁)의 그림을 얻을 수만 있다면 천하의 광영이외다. 허나 지금 제가 말씀드릴 것은…”
유한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실은 저 아이 말이오.”
“저 아이?”
“예. 저기 앉은 세오 말입니다. 세오는 어린 시절부터 회사(繪事·그림그리기)를 즐겨, 중국과 조선의 화첩(畵帖)들을 있는 대로 모두 임모하면서 습작을 해온 아이지요. 사또께서 저 아이를 거두어, 손으로 그리는 기예(技藝) 저 안쪽에 있는 깊은 학덕을 잠깐이라도 베풀어 주신다면 저 아이로선 큰 은혜를 입는 셈이 될 것입니다. 이 고을에선 따를 이가 없다할 만큼 재능을 갖추고 있는지라, 궁벽한 시골살이에서 적적함을 달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허어. 과연 그런 아이란 말이오?”
세오는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며 몸에 지니고 온 종이를 풀었다. 거기엔 해송과 바다를 그린 그림 몇 점이 들어있었다. 아직 습기(習氣)가 가시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기이하고 독창적인 화풍이었다. 세오는 그렇게 선에게로 왔다.
글=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 및 자료=이삼우 기청산식물원 원장 제공

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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