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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폭포 비하대 아래에서 전통춤 공연을 하는 모습. 포항미술협회는 매년 가을 겸재 정선을 주제로 한 ‘겸재, 가을을 보다’ 행사를 열고 있다. 단아한 모습의 춤사위에서 ‘청겸진경의 비밀’에 등장하는 기생 월섬이 비하대 아래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연상된다. |
월섬은 그림을 그리던 종이를 옆에 제쳐놓고 일어섰다.
“한 잔(盞) 먹새그려, 또 한 잔 먹새그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예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송강(松江·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부르며 그녀는 신명이 난 듯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다닌다. 비단치마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선은 중허대(비하대) 위의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었다.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 제…”
술에 취해서인가, 노래에 취해서인가. 그녀가 살짝 비틀거리는 듯 했다. 잠깐 노래가 끊어졌다. 짧은 정적. 문득 비명소리가 환청(幻聽)처럼 들렸다. 폭포소리인가. 그런데 그 소리와 함께 좌중에서 울음소리가 터졌다. 울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선은 고개를 돌렸다. 춤을 추고 있던 월섬이 보이지 않는다. 비단신발 한 쪽이 보인다. 그것은 뒤집힌 채 기화대 난간에 놓여있다. 갑자기 앞이 아득해진다.
“월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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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는 연산폭포 옆 암벽에 갑인년(1734) 가을에 정선이 다녀갔다는 뜻으로 ‘甲寅秋 鄭敾(갑인추 정선)’을 새겨 놓았다. 지금도 당시의 탐승각자(探勝刻字·명승지 바위에 새긴 이름)가 남아있지만, 쉽게 찾을 수 없다. 겸재는 당시 크고 깊게 탐승각자를 하던 관리들과는 달리,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에 작고 얇게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이 때문에 오랜 세월 풍화로 마모가 심해, 탁본을 떠야만 확인할 수 있다. 자연을 먼저 생각하는 겸재의 마음이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사람들은 폭포 쪽을 향해 저마다 고개를 내밀었다. 두 줄기 사자쌍폭 아래 기화담엔 하얀 물거품만 보인다. 월섬의 실족, 그리고…. 이렇게 가뭇없이 낙화하는 꽃이라니. 선은 현기증이 났다. 내연산 꾀꼬리단풍이 물빛으로 아른거린다.
선은 며칠째 입맛을 잃었다. 이 아이에 대한 마음이 이 정도였던가.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삶에 선물처럼 다가왔던 아주 귀한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빈 자리는 메울 수 없을 만큼 컸다. 화풍을 일대 혁신하려는 선에게 월섬만큼 뛰어난 안목을 가진 조언자는 없었다. 선을 따라다니며 진경(眞景)산수를 부지런히 습작한 그녀의 미완성 작품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쓰려왔다.
세오는 말을 잃었고, 그저 선을 바라보며 펑펑 울기만 할 뿐이다. 보경사에서 다비(茶毘)하던 날 세오는 월섬의 거문고를 함께 태웠다. 생전에 그토록 아끼던 현금(玄琴)을 품에 안고 외롭지 않게 가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은 은폭의 한산대와 습득대 풍경을 월섬에게 주려고 그리고 있던 중이었다. 반쯤 그려놓은 그것을 찢어버렸다. 선은 기화대와 기화담, 그리고 낙화하는 작은 꽃 하나를 며칠째 그리고 있다. 눈물이 흘러 먹물이 번진다. 산수는 그냥 산수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이라고 월섬은 말했다. 얼굴이 마음에 따라 표정을 바꾸듯 산수 또한 마음에 따라 그 기운과 기분을 지니는 것이다. 얼굴에 관상이 있듯, 산수에도 생로병사가 있으며 운명과 사랑 그리고 슬픔이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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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탐승각자가 남아 있는 연산폭포 옆 암벽. 암벽 앞에 물웅덩이가 있어 접근이 어렵다. |
선은 월섬과 함께 내연의 명물인 삼동석(三動石)에 갔던 날을 떠올렸다. 세 개의 바위가 솥발처럼 서있는 바위는 기이했다. 손가락으로 가만히 밀어도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정작 힘을 들여 양손으로 밀어붙이면 꿈쩍도 않는 것이다.
“바위가 생각이 있어서 저러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던 힘이라는 것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인가.”
그때 월섬은 이런 말을 했다.
“때론 부드러움이 큰 것을 움직이고, 때론 약한 것이 더 강한 힘을 내는 게 아니더이까? 진경산수는 골기(骨氣)만으로 채워질 수 없지 않은지요? 부드러운 것, 슬픈 것, 쓸쓸한 것, 먼 것, 옅은 것들이 오히려 동세(動勢)와 적막을 이끌어내는 힘이 될 것입니다.”
“오호, 월섬아. 너는 십만 장을 사생한 나보다 더 깊은 논의를 꺼내는구나.”
세오가 찾아왔다. 동헌 마당을 걸으며 선이 불쑥 말했다.
“관음폭 큰 바위에 각자(刻字)를 하는 것은 어떠냐?”
“내연산에 대한 사또의 마음을 담고 싶으신 것이지요?”
“그래. 그렇기도 하지만, 월섬이의 이름을 새겨놓고 싶구나. 이제 그 아이는 내연산이 된 것이 아니냐?”
세오가 다시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튿날 선은 서각쟁이를 불러 산을 오른다. 바위에 이르러 지필묵을 펼치고, 한 여인의 이름을 쓴다. 몇 번이나 썼다가 찢고 다시 쓴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세오가 묻는다.
“사또, 그 아이 이름은 월섬이온데 어찌 경기달섬(慶妓達蟾)이라고 쓰는지요?”
“나도 모르겠다. 문득 그렇게 써놓고 싶구나. 이 산이 내연(內延)이거나 내영(內迎)으로 불리는 것은, 해를 안으로 깊이 맞아들이는 산이라는 뜻이 있을 것이다. 즉 연일(延日)과 영일(迎日)이란 지명 앞에 내(內)자가 붙은 것이 아니더냐. 달이 해를 받아들이는 형국이니 음양이 조화롭지 않은가. 달섬이는 여기서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선은 눈자위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이제 너를 그냥 한 번 아는 것이 아니로다. 달섬아.’
(관음폭에서 비를 만나면 숨어들기 딱 좋은 바위. 그 암벽면의 왼쪽에 ‘경기달섬’이라고 조금 작은 예서체풍의 글씨가 씌어져 있다. 그 옆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는 힘있는 해서로 이광정(李光正)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광정은 경상감사를 지낸 이휘정(1760~?)의 초명(初名)이다. 그는 대사헌을 거쳐 호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봉조하(奉朝賀·국가 공헌을 기리는 명예직)를 받은 정치적 거물이었다. 뒷사람들은 이광정과 달섬이 함께 온 것으로 오해하였지만, 실은 달섬의 이름이 먼저 새겨진 것이다. 겸재가 달섬을 새긴지 104년이 지난 1838년에 관찰사였던 광정은 내연산에 들렀다. 그는 당시 청하현감에게서 이 글씨를 새긴 사연에 대해 들었다. 달섬을 새긴 겸재의 애틋한 심사에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 또한 달섬의 장진주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싶구나. 나의 이름을 달섬 곁에 새겨주시오.”)
선은 쌍폭 위에서 월섬의 춤을 보던 날을 생각하며 ‘내연산 폭포도’를 그렸다. 주변의 잡다한 산세를 다 없애고, 큰 줄기의 폭포 하나만 중심에 놓았다. 그리고 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암봉과 암벽이 단지 바윗덩이가 아니라, 서책을 들고 열심히 토론을 벌이는 학생의 모습과도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너럭바위에 앉아 산의 골기와 폭포를 바라보는 네 사람을 그려넣었다. 인간과 자연이 이토록 장쾌하게 직면할 수 있는 자리가 또 있겠는가. 기화대 절벽바위 위에서의 정경을 떠올리며 붓을 움직일 때 가슴이 떨려왔다. (그림 속의 왼쪽 바위는 선일대이며, 그 위에 그려져 있는 암자는 없어졌다. 기와 파편만 옛 정취를 쓸쓸히 증언할 뿐이다.) 연산폭포 뒤로 중허대(中虛臺·1753년 이상정(李象靖)이 비하대로 이름을 바꾼다)가 보이고, 낙락장송이 기세도 좋게 드리워져 있다.
어느 날 신유한이 찾아와 함께 해월루에 앉았다.
“요즘 사또의 모습을 보니 집 앞에 다섯 그루 버들을 심고 은자를 자처한 동진(東晋)의 오류(五柳) 선생(도연명·365~427)같습니다. 오류의 사시시(四時詩)는 오래도록 사람을 감동시킨 시중화(詩中畵)였다 들었습니다. 봄 물은 온 연못에 가득 차고(春水滿四澤) 여름 구름은 기이한 산봉우리들을 연출하고(夏雲多奇峰)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뿜어내고(秋月揚明輝) 겨울 산은 낙락장송을 빼어나게 하는구나(冬嶺秀孤松).”
“과연 그림같습니다. 근자의 일로 추월(秋月)의 밝은 빛이 얼마나 사람을 사무치게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허어, 사또. 그건 이제 잊으시지요. 그런데 저 5언절구가 운우지정(雲雨之情·섹스)을 암시한다는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자연이 인간의 운우지정을 담는 건 만고의 이치가 아니오?”
“그러게 말입니다. 오류선생은 그걸 아셨는지 모르겠는데…. 봄 물은 여자 열여덟이라 건드리기만 해도 철철 넘치는 시절이고, 여름 구름은 서른 사내의 마음이라 울뚝불뚝 때도 없이 서 있으니 사고 치기 좋은 때이고, 가을 달은 여자 나이 마흔이니 쓸쓸하여 온 대지가 허하고, 겨울 산은 쉰을 넘긴 사내로 혼자 자는 밤도 나쁘지 않아지는 때라 하오이다.”
“허허, 대단한 해석이외다.”
그러면서 선은 생각했다. 아! 내연산은 4계절이 모두 한 풍경에 들어있구나. 봄 물과 기봉과 달빛과 고송. 이런 기화(奇畵)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래도 도연명의 절창은 ‘음주’시가 아니겠습니까? 추향아, 네가 거문고를 한 번 타보거라.”
유한은 새로 온 기생에게 이렇게 주문한 뒤 시를 읊는다.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띠풀 엮어 마을에 초막을 지었네/ 수레소리 말소리 들을 일 없네/ 그대 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마음은 멀고 사는 곳은 구석이니/ 동쪽 울 아래 국화를 따면서/ 멀리 남산 바라보면서 사오
시를 들으며 선은 생각했다.
‘아. 그래 유연견남산이다. 중허대 위의 고송에 기대어 선 내연산 고사(高士)를 그려보자. 거기엔 월섬을 생각하는 내 뜻을 담으리라.’
부채그림인 ‘고사의송관란도(高士倚松觀瀾圖)’의 화의(畵意)가 생겨난 밤이었다. 관란(觀瀾)은 맹자의 말, ‘관수유술 필관기란(觀水有術 必觀其瀾·물을 보는 법에도 노하우가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을 들여다보라)’에서 얻은 말이지만, 물거품으로 사라지던 한 여인의 삶을 돌이키며 음미해보는 자화상을 숨겨놓고 싶었다.
이제 선은 청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내연산의 폭포 중에서 가장 동세가 뛰어난 3용추(연산폭, 관음폭, 잠룡폭)를 중심으로 이 남녘산의 빼어난 기운을 표현해내는 일이다. 12폭 중에서 제4폭부터 제7폭까지 가장 헌걸찬 폭포를 골랐다. 제5폭은 무풍폭이긴 하나, 옛 사람들은 무풍계로 다뤄 폭포로 치지 않았다. 금강산에서도 볼 수 없다는 물의 대향연으로 영남첩의 대미를 삼으리라. 그런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계속>
글=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작가·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이삼우 기청산식물원 원장 제공

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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