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7] 추락진경을 발견하다

  • 입력 2011-12-22  |  수정 2025-10-14 10:00  |  발행일 2011-12-22 제11면
청겸진경(淸謙眞景)= ‘청하’와 ‘겸재’의 줄임말에 ‘진경(진경산수)’을 연결시킨 합성어로 진경산수의 발현지가 포항임을 뜻한다

월섬아、 3절의 벼랑 위에 네가 물이 되어 쏟아져내리고 있구나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7] 추락진경을 발견하다
내연산 12폭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연산폭포. 겸재 정선이 청하현감 시절 완성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내연삼용추’의 배경이 된 곳이다. ‘청겸진경의 비밀’에서 선(겸재 정선)은 내연산의 폭포를 보고, 죽은 월섬이 자신에게 말하려는 것이 ‘추락의 미(美)’임을 알게 된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폭포수의 마음, 즉 하심(下心)을 그려, 산이 솟아오르는 기운과 깊이 교합하게 하는 것. 선은 그것이 진정한 진경임을 거듭 깨닫는다. <포항시 제공>


월섬을 여읜 뒤 선은 미친 듯 그림을 그렸다. 산수(山水)를 화폭에 담는 의미를 붙잡고 고뇌하다가 절벽 아래로 사라져간 꽃같은 여인, 월섬.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툭 던졌던 한마디가 선의 귀에 또렷이 걸려 있었다.

“이 산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저는 내연산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 이 산의 정령(精靈)이었나 봅니다. 사또를 봬온 것은 산의 뜻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내연산이 말하는 소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어리석은 달섬, 나는 그것보다 네가 더 귀중했단 말이다. 문득 마음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그리던 화폭에다 마구 난필(亂筆)을 휘둘렀다. 먹이 번지다만 여백을 멍하니 바라보노라니 문득 그녀가 거기에 나타나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는 듯하다. 왈칵 눈물이 솟는다.

“사또, 괜찮으시옵니까?”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세오였다. 선은 말했다.

“세오야, 우리 내연산에 가보자꾸나.”

“이 빗속에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괜찮다. 화구는 챙기지 마라.”



시복 하나를 데리고 그들은 산을 오른다.

“세오야, 이곳을 왜 용추(龍湫)라고 부르는지 아느냐?”

“폭포의 형상이 용이 승천(昇天)하는 양상을 닮았고, 그 아래에 있는 소(沼)가 부글거려 용의 기세를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요?”

“옳은 말이다. 그런데 조선 땅에는 무려 90여개의 용추가 있단다. 그런데 이곳 내연산 용추가 으뜸인 까닭은 무엇이겠느냐?”

“용추라는 이름이 그렇게 많사옵니까? 그래도 내연산만큼 거듭거듭 굽이치며 돌아흐르는 폭포가 드물지요. 흐르는 물의 용틀임이 장관이니 뭇사람들의 감탄을 얻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바로 그렇다. 나는 여기 와서 관란(觀瀾·물구경)의 도를 느끼는 듯하다. 그것을 겸재 진경의 골수(骨髓)로 삼고 싶다. 금강산에선 산수(山水)를 보았지만, 여기선 뒤집어 수산(水山)이라 말할 수 있는 뜻밖의 기세가 있다. 그것을 그리고 싶다.”

“사또, 물을 그리신다면 그냥 물이 아니라 물의 뜻을 그리는 것이겠지요? 물의 뜻은 무엇이옵니까? 낮은 곳으로 머리를 내려 깊이 추락하는 것, 그 끝없는 하심(下心)이 바로 물의 뜻이 아니올지요?”

하심! 이때 선이 세오를 쳐다보았다. 비를 살풋 맞은 머리칼이 곱다. 아름다웠다. 선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껴안고 말았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달섬이 죽음으로써 내게 말해준 것도 바로 ‘추락’이었다. 아, 이 여인은 내게 이걸 말하려 하였구나. 물이 떨어지는 저 마음을 그려, 산이 솟아오르는 기운과 깊이 교합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산수의 웅장한 협주(協奏)로 울려퍼지는 그 경지를 내게 일러주려고 하였구나.”

세오가 말했다.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사또. 서른 살 겸재는 일약 솟아오르는 금강산같은 기세였습니다. 1만2천봉이 모두 저마다의 에너지로 솟아오르면서 비약의 노래를 부르는 그 기개가 오늘의 겸재화풍으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쉰에서 예순으로 치닫는 겸재는 무엇일까요? 삶이란 비약으로만 이뤄질 수 없는 것이며, 또 바위같은 골기(骨氣)에 더하여 낮은 곳으로 내려앉는 겸허와 물같은 유연함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 또한 달섬이 말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선이 말했다.

“내 무슨 뜻인지 이제야 뚜렷이 알겠노라. 젊은 시절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폭포를 그린 적이 있다. 한 번은 금강외산의 ‘구룡폭(九龍瀑)’이었다. 단순 장쾌한 폭포의 동세(動勢)를 담은 것으로, 수십 차례 습작을 해오던 중국의 ‘여산(廬山)폭포도’의 화의(畵意)를 새겼지. 그러니까 관념 산수를 금강산에 응용한 것이었다. 폭포는 단순하지만, 그것을 감싼 산의 형세가 험하고 비장하여 긴장미를 자아내는 힘이 있었어. 그러다가 금강산 길목의 철원에서 ‘삼부연(三釜淵)폭포’를 그리면서 홀연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 폭포는 바로 세 번 꺾이는 3절(三切)의 물길로 기운을 증강하는 형세가 볼 만했지. 내연폭포도 또한 이 3절의 굽이치는 힘을 활용해 보리라.”

선은 문득 바위 벼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아, 달섬아. 3절의 벼랑 위에 네가 물이 되어 쏟아져내리고 있구나.”

세오가 말했다.

“내연은 12폭이라 하는데 3폭으로 줄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진경은 마음이 받아들이고, 눈이 읽어내고, 감정이 흘러가는 그것을 담는 것이다. 폭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폭포의 정신을 그리는 것이요, 산수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산수의 혼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낙락장송은 빽빽이 늘어서서 천 명의 병사가 줄을 선 듯하고, 성난 폭포는 급히 쏟아지니 만 마리의 말이 울부짖는 듯하다(長松鬱立千兵列 怒瀑急噴萬馬喧). 이 여산(廬山)의 기세를 내연산의 기세에 옮겨보리라.”

“아, 사또. 미천한 저에게도 감흥이 솟아나는 듯합니다. 산경(山景)의 진수는 형상에 있고, 수경(水景)의 골수는 바로 소리에 있다는 뜻이 아닌지요? 물소리를 그려내는 일, 그것이 또 하나의 진경입니다.”

겸재가 소리쳤다.

“화성(畵聲)! 소리를 그린다. 세오가 내 귀를 번뜩 뜨이게 하는구나. 세오야. 얼른 내려가자꾸나. 내연삼용추의 큰 음악을 담아야겠구나.”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7] 추락진경을 발견하다
내연산 비하대 아래에 있는 관음폭포. 폭포수의 흰 물줄기가 산수의 혼을 담으려 했던 겸재의 마음을 닮은 듯하다. <포항시 제공>


상악(霜鍔)준법. 선은 세필 두 자루를 거머쥐고 깎아지른 바위벽을 서릿발같이 혹은 칼끝같이 그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부벽(長斧劈)준법. 붓을 뉘여서 끝을 길게 뻗치게 하는 도끼자국 화법으로 바뀌었다. 깎아지른 암벽이 그려졌다. 절벽 위에는 흙산이 있어서 수림(樹林)이 좋다. 미점(米點). 중국 북송화가 미불이 창안한 점묘법을 쓴다. 붓을 눕혀 쌀알같은 점을 찍어 촉촉한 기운을 표현한다. 뼈대같은 암벽을 부드러운 흙산이 감싸고 있으니 음양의 조화가 화폭의 생기를 돋운다. 폭포는 중폭인 두 갈래 관음폭이 부각되었다. 관음폭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오른쪽 벼랑 중턱으로 난간을 흐르는 길이 나 있어, 물과 인간이 서로 동행하며 대화하는 것 같은 기분을 자아낸다. 중폭에는 소(沼)의 꿈틀거리며 휘어도는 물의 형세가 눈에 들어온다. 관음폭 옆에는 세 개의 동굴이 그려진다. 이른바 관음굴이다. 이는 원래 상폭인 연산폭 부근에 있으나, 거기엔 표현하기가 어려우므로 정선은 이곳으로 옮겼다. 흥취를 위해 변화를 준 것이다.

“상폭인 연산폭에 사다리가 보입니다.”

곁에 있던 세오가 가만히 말을 꺼내자 선은 대답한다.

“그래.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풍경 전체를 맛보기도 하지만, 그림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 들어가고 싶어하기도 하지. 우리가 걸어올랐던 저 작은 사다리는 그림 감상자들을 바로 그 자리에 데려가는 구실을 하지. 저 사다리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써 그는 그 위에 있게 되고, 그러면서 폭포소리도 들리게 되며, 산바람도 느끼며, 험준한 바위 기운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

“산 끝에 작은 암자도 보입니다.”

“그래. 지난 날 월섬과 함께 머물렀던 계조암이 아니더냐?”

“아, 그렇군요. 이렇게 보니 정겹습니다.”

“사또, 과연 내연삼용추는 다양한 형상의 폭포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면서 산의 정적 속으로 파고드는 기이한 기운이 생동하고 있는 듯합니다. 기절(奇節)한 산세가 두루 표현되어 명승의 한 면목을 전신(傳神·혼을 전함)하고 있는 큰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가? 하지만, 내 마음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 무엇이 있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며칠 뒤 선은 내연산 할무당제(祭)를 보고 돌아온 청천 신유한, 최천익, 오암, 세오를 만났다. 당시 할무당제는 내연산 문수봉과 삼지봉 사이에 있는 할무당재의 백계당(白啓堂)에서 정월대보름과 팔월대보름 두 차례 지내는 제사였다. 선은 웃으며 오암에게 물었다.

“불도를 닦는 이로서, 산신에게 예를 표해서야 되겠소?”

오암은 대답했다.

“할무당은 원래 보경사에서 기거하던 박씨 성을 가진 보살이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지극정성으로 부처에게 빌면서 죽어서도 남을 돕고 싶다고 서원(誓願)하였습니다. 그가 돌아갔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 그 몸뚱이를 할무당재에 물어다 놓았지요. 그 위에 돌들이 저절로 쌓여 무덤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지나다가 우연히 그 앞에 엎드려 기구(祈求)를 하니, 하는 것마다 이뤄졌다 하더이다. 그러하니 내연산 할무당은 부처의 뜻을 펴는 큰 보살이 아닐지요?”

선은 말했다.

“허허, 그건 몰랐구려. 청천은 거기 가보니 어땠소?”

“참으로 내연산이 보통 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저 할무당은 경상도 사투리로 쓰는 할무이라는 말과 ‘무당(巫堂)’이라는 말이 합쳐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당은 물론, 오래전에 신과 통하던 여성 지도자를 가리키는 의미고요. 할무당을 고모(姑母)라고 하는데 조선의 큰 뿌리가 되는 마고(麻姑)할머니가 아니겠습니까. 백두산, 태백산으로 이어진 천제(天祭)의 전통이 여기까지 내려와 할무당 신제로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였소이다.”

“놀랍군요. 천익은 무엇을 보았는가.”

“예. 할무당이 여왕이라면 여왕의 부군이 계시더군요. 대권산왕대신이라는 이름으로 할무당 옆에 패가 모셔져 있더군요. 이 분을 대개 신령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내연산의 원래 산신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선이 말했다.

“산이 물과 바위의 음양을 갖추고 있으니, 그 신령 또한 그런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양이오.”

세오가 웃음을 띠며 거들었다.

“사또께서는 오직 산수 생각만 하시는 분 같습니다.”

“핫핫. 그러냐?”

며칠 뒤 세오에게 ‘내연산 폭포도’를 주었다. 그녀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 보더니 말했다.

“너럭바위 위에 있는 네 사람 중에서 서 있는 사람이 문득 월섬이처럼 느껴집니다.”

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오가 다시 말했다.

“중허대(비하대) 위의 노송이 참으로 돋보입니다. 마치 스승 겸재가 천하의 화풍을 섭렵하고 낙락장송으로 거기 세상을 굽어보면서 서 있는 것 같습니다.”

“네가 나를 과하게 추켜세우는구나.”

“아닙니다. 진심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또. 그리고 제가 사또께 간절히 올릴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이라면…?’

글=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 기획 : 포항시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7] 추락진경을 발견하다
겸재 정선이 청하현감 시절 그린 ‘내연산폭포도’.<이삼우 기청산식물원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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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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