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미대동 인천채씨 선비도 “대한독립 만세”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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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3-01   |  발행일 2013-03-01 제35면   |  수정 2013-03-01
불교계·유림계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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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동화사 심검당. 현재 대웅전 오른편에 있다. 심검(尋劒)은 ‘지혜를 찾는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9명의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이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작은 사진은 고봉선사.

3·8대구독립만세운동 이후 4월13일까지 경북지역에선 사흘을 제외하고 매일 수차례의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초기 만세운동이 종교계와 학생 등이 중심이었다면 후기로 갈수록 농민을 비롯한 일반민중의 참여가 늘어났다.

비폭력시위대에 발포함으로써 사상자가 늘어나자 시위군중도 이에 맞서 파출소나 면사무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는 등 과감한 양상을 띠었다.

대구(달성 포함)에선 3월30일, 4월15일·26일·28일 만세사건이 일어났다.


◇ 3·30 만세운동

권청학 등 불교학도
덕산정시장 장날 거사
수천명 동참 이끌어…

사료 등 수집 통해
부산 범어사처럼
독립운동 선양해야


◇ 4·26 만세운동

채씨 문중의 선비들
여봉산서 2일간 “만세”
토속 성씨 문중 가운데
마을단위 유일 참가

광복 후 좌익 연루돼
제대로 평가 못받아


◆ 동화사 지방학림(學林)만세운동

불교계에선 만해 한용운, 백용성 스님 등 2명이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됐다. 불교계 지도자였던 두 스님의 3·1만세운동 참여는 불교계 종립학교였던 중앙학림(현 동국대) 학생들에게 이어진다. 만해는 중앙학림의 강사였다. 중앙학림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독립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했다. 3·1운동은 중앙학림 학생들에 의해 해인사, 범어사 등 전국사찰로 확산됐다.

이들 가운데 중앙학림 학생으로 달성군 공산면 진인동 출신인 윤학조가 3월23일 대구로 내려와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 동화사 지방학림(현 동화사 승가대학) 학생이었던 후배 권청학·김문옥 등을 만나 불교계의 만세운동참여 소식을 알리고, 만세운동을 할 것을 권고했다.

이들은 처음 공산면 백안동 백안장터에서 궐기할 것을 계획했으나, 장터가 좁고, 사람도 적으니 대구에서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월28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권청학·김문옥·이기윤·허선일·김종만·김윤섭·이보식·박창호·이성근 등이 동화사 심검당(尋劒堂)에 모여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이틀 후 대구 덕산정시장(남문 밖 시장) 장날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거사 하루 전 동화사 포교당이었던 보현사 김상희의 집에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30일 오후 2시쯤 덕산정시장 안에서는 큰 장대에 달린 태극기가 나부끼고,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생들을 선두로 장꾼과 민중 수천명이 시장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일본 군경이 총칼로 이들을 즉각 해산시키고 주동자 10명을 잡아갔다. 이날 시위로 윤학조, 권청학, 김문옥 등 10명이 검거돼 모두 10개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3·30대구만세운동과 관련해 고봉선사(1890~1961)가 주도한 혐의로 마산교도소에서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고봉선사는 대구출신으로 혜봉선사의 제자이며 숭산스님의 스승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봉선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과 연루됐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동화사 주지는 김남파(金南坡)로, 1917년 조선총독부에 비슬산 대견사를 없애자고청원하는 등 친일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 동화사 만세운동 평가

동화사는 3·30만세운동으로 10명의 애국지사가 구속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음에도 구체적인 연구가 미흡한 편이다. 실례로 만세운동과 관련해 국가기록원에 나와 있는 10명의 일본어판결문도 제대로 번역되지 않고 있다. 또한 동화사 성보박물관에도 만세운동관련 기록과 유품이 전무하다. 동화사 심검당은 당시 현 법화당 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 오른쪽에 있다. 하지만 심검당 입구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간판만 있을 뿐 만세운동 관련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정만진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자문위원은 “부산 범어사는 범어사 학림의거를 선양하고 있는데 비해 임진왜란 당시 영남승군(嶺南僧軍)의 사령부였던 동화사가 학림소속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알리는데 소홀한 측면이 있다”면서 “동화사가 의병과 경북지역 불교계 독립운동의 본산이었음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성문 동화사 주지스님은 “광복 후 비구·대처간 분규로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소실돼 안타깝다”면서 “차제에 지방학림 학생들의 학적부를 찾는 등 독립운동사료를 수집해 동화사가 만세운동에 기여했음을 밝히고 고양하겠다”고 밝혔다.


◆ 4·26미대동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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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동구 미대마을 초입. 멀리 보이는 산이 여봉산이다.

달성군 공산면 미대마을(현 대구시 동구 미대동)에서는 대구지역 만세운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일제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4월26일 미대마을 청년유림 채갑원(26)의 집에 인천 채씨(蔡氏) 문중 선비 채희각·채봉식·채학기가 모여 이날 밤 마을 동쪽 여봉산에 올라 만세운동을 하기로 했다. 이들은 밤10시 여봉산 정상에 올라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28일 밤 10시에는 채명식·채송대·채경식·권재갑도 이들과 함께 다시 올라가서 만세운동을 했다. 이들은 치안방해죄로 구속됐다. 이틀 연속으로 만세를 외친 4명에겐 징역 8월, 이튿날 독립만세를 외친 가담자에겐 징역 6월을 선고했다.

이 만세사건은 달성서씨, 인천이씨, 경주최씨 등 대구지역 24개 토속성씨 문중 가운데 인천채씨 문중이 마을단위로 유일하게 대구만세운동에 참여한 사건이다. 수는 적었으나 각지에서 일어나는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팔공산 아래 산골에서 의분을 참지 못해 봉기했다.

지금도 미대마을은 인천채씨 집성촌이다. 입향조인 대구의 거유(巨儒)송담 채응린의 후손들이 주로 살고 있다.

채병록씨(79)가 보유한 인천채씨 참봉서귀정공파 족보에는 일제의 기록과 달리 이들의 만세운동 내용을 보다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문중 선비들은 일제강점기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 대구향교의 유림들을 선동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부득불 채씨 문중이 앞장서 궐기하게 됐다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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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갑원 의사.

또 채갑원이 서울 등지에서 독립운동 지사들과 접촉하면서 국권회복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족질 채학기에 알렸으며, 4월26일 새벽 여봉산에 수백명의 군중이 올라가 천지신명께 제를 지낸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대구부로 진격하다 일본검경에 체포됐다고 나와 있다. 채갑원이 접촉한 주요인사 가운데는 이 마을 출신 독립지사 채충식(1892~1980)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채충식은 당시 대구농림학교 학생으로 일찍 독립운동에 나선 선각자였다. 일제하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했던 그는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인물이다.

채충식의 손녀인 채영희씨(대구10월항쟁유족회장)는 “독립투사였던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도 대구10월항쟁에 연루돼 결혼 4년 만에 돌아가셨다”면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밝혔다.

대구시 동구 미대동 인천채씨 문중 만세운동에 대해서는 김태락 전 팔공문화포럼 부회장 등이 적극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있다.

그는 “광복이후 미대동 출신 독립운동가가 좌익에 연루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면서 “‘미대동 8의사’비석을 세워 미대마을의 애국활동을 널리 알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본욱 대구향교 장의(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위원)는 “대구의 유림이 3·1운동에 직접 관여한 사건은 미대동 4·26만세사건이며, 대구에서는 그해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과 연루돼 월배지역 단양우씨 문중 지도자 등이 옥고를 치렀다”고 밝혔다.


■ 박동욱 광복회 대구경북지부장

“대구는 항일·독립운동의 본산 독립운동기념관 건립 필요해”

박동욱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장은 “3·1운동이 실패한 운동이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라면서 “3·1운동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가 북간도로, 상하이 등지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고 말했다.

박 지부장은 또 “대구는 3·1운동뿐만 아니라 이전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해 조선국권회복단, 광복회의 본산이었고 만세운동 이후에도 대구사범학교, 대구상업학교 등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으며 훌륭한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곳”이라고 했다.

박 지부장은 “광복회관과 항일운동기념탑을 중심으로 맞은편에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임란의병 성지, 영남제일관 등이 있는데, 이곳을 성역화해 대구지역 각지에 나눠져 있는 유품과 자료를 한데 모아 전시·교육할 수 있는 대구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는 게 마지막 바람”이라고 밝혔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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