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청 앞 1㎞ 넘는 만세운동 행렬과 일제 80연대 병력이 대치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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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3-01   |  발행일 2013-03-01 제34면   |  수정 2013-03-01
기독교 중심 3·8만세운동

1919년 3·1독립운동은 일제에 저항한 식민지해방투쟁이었다.

우리 역사상 종교, 계급, 신분을 초월한 최초의 민족운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켰고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18년 말 중국 동북3성에서 안창호·신규식·박은식·김약연·이상룡·김동삼 등이 서명한 무오독립선언과 이듬해 2월 일본 동경유학생이 중심이 된 2·8독립선언이 3·1운동의 모태가 됐다.

구한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활동의 주 무대였던 대구·경북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8일 대구에서 처음 시작됐다.

오세창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대구의 경우 서울, 평양보다 늦게 만세운동이 일어난 건 천도교·기독교·불교계와 유림이 함께 참가하지 못해 2월말에야 서울의 운동본부와 연결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독립선언서도 3월4일경 대구에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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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 아담스가 사용한 사택. 3·8만세운동 당시 이곳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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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 동산의료원 내 교육·문화박물관 2층에 있는 3·8대구만세운동 행진모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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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만세운동 당시 대구신명여학교 학생과 교직원. 뒷줄 왼쪽에서 첫번째가 이재인 선생, 세번째가 이선애,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임봉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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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집 목사


◆대구만세운동 모의

3월8일 대구봉기는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대구출신 이갑성이 2월24일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선교사를 돕는 직책), 백남채·김영서 계성학교 교사, 이재인 신명여학교 교사 등 대구지역 3처 교회(현 제일·남산·서문교회)지도자와 만나 서울에서의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대구에서도 궐기할 것을 권고하면서 촉발됐다.

이만집, 김태련 등 기독교계 지도자와 홍주일 천도교 경북교구장 등은 큰장(옛 서문시장) 장날인 8일 오후 1시에 봉기를 하기로 모의하고, 학생을 비롯해 민중동원에 나섰다.

이후 김태련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실 등지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하지만 일경이 거사에 앞선 4일과 7일, 각각 홍주일 교구장외 2명과 백남채 등 주모자 수명을 체포해 구속시키면서 특별경계령을 내리는 등 감시를 강화했다.

대구만세운동이 대구인구수에 비해 참여자가 비교적 적었던 이유는 일제가 경상도의 중심지였던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을 사전에 강력하게 저지했고, 유림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학생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만세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당시 계성학교에선 박태현·김삼도·심문태 등 35명이 동참했고 신명학교에선 교사였던 이재인과 임봉선, 이선애 등 50명이 참여했다.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은 대남여관 주인의 아들 대구고보(현 경북고)4년생 허범과 접촉해 신현욱·백기만·하윤실 등 대구고보 간부학생에게 거사계획을 알려줌에 따라 대구고보생 200여명이 만세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또 동산성경학당(현 영남신학대)강습생 20명도 참여했다.


거사 직전 지도자 다수
체포되면서 한때 위기


토요일 오후 1시 큰장…
장보는 척 빨래하는 척
속속 집결 ‘긴장 고조’


대구고보 학생 200명이
도착하는 순간 기다렸다
독립선언문 낭독하고
일제히“대한독립 만세”


기생·머슴 등도 합세
행렬 어마어마해져…
일제 총칼로 진압 시작
피와 흙이 ‘뒤범벅

◆8일 서문 밖 그날의 함성

거사 하루 전,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지만 8일 오전 토요일에는 활짝 개었다. 정오가 되면서 큰장에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삼엄한 일경의 감시 속에 대구의 민족지도자를 비롯한 계성학교 학생은 한복을 입고 장꾼인 것처럼 변장하고, 거사장소로 향했다. 신명학교 학생도 오전 수업을 마치고 빨래를 하러 가는 척하며 삼삼오오 목적지로 향했다. 하지만 오후 1시에 도착하기로 했던 대구고보 학생이 오지 않아 1시간 이상 행사가 지체됐다. 2시를 넘어서자 대구고보 학생 200명이 교복을 입은 채 일경의 저지를 뚫고 뛰어왔고, 동산성경학원 학생도 나타났다. 수천여명이 운집한 시장 안은 긴장감 속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김태련 조사가 준비해 둔 달구지 위에 올라섰다. 그는 독립선언문을 읽으려다 일경의 제지로 공약3장만 낭독했다. 이어 이만집 목사가 달구지에 올라 힘차게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에 1천여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품에서 꺼내 일제히 따라 외치며 지도부를 따라 행진했다.

일경이 완강히 제지했지만 이미 터진 봇물이었다. 선교사의 일을 돌보던 농민 안경수가 태극기를 꽂은 깃대로 기마경찰이 탄 말의 엉덩이를 찌르자 말이 달아났다. 그 사이 선두행렬이 앞을 헤치고 전진했다. 1㎞가 넘는 만세운동행렬은 큰장 강씨네 소금가게 앞(옛 동산파출소)에서부터 동산교를 지나 본정(현 경상감영길)~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로 향했다. 일경은 총칼로 저지하기를 멈추고 행렬을 지켜보며 예의주시했다. 만세소리는 대구전역을 뒤덮었다. 이윽고 대구경찰서 부근에서 일촉즉발의 대치가 있었다. 경찰서 옥상에는 기관총이 시위대를 겨누었다. 하지만 발포하지 않았다. 섣불리 발포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발전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세행렬은 대구경찰서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꺾어 경정(현 종로)으로 진로를 바꿨다. 지게꾼·농민·양복사·잡화상·구둣방·약방주인·머슴·기생까지 합세해 시위대가 크게 불어났다. 이만집 목사와 그의 아들 이성해(계성학교), 김태련 조사와 아들 김용해 등 부자가 동참한 경우도 있었다.

당황한 일제는 더 이상 만세운동이 확대되면 걷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헌병대와 대구주둔 80연대 병력을 동원해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만세행렬은 종로를 거쳐 지금의 약전골목~중앙치안센터~대구백화점 쪽으로 향했다. 맑았던 날씨가 흐려지고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일제는 달성군청 앞에서 총칼과 곤봉으로 평화적인 시위대를 구타하며 무차별 진압을 했다. 군중은 흩어지면서 산발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전날 비가 내려 길이 질척해진 까닭에 피와 흙이 범벅이 됐으며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김태련의 아들 김용해는 아버지가 맞는 것을 보고 저항하다 심하게 구타를 당해 실신했다.

◆10일 남문 밖 함성

만세운동은 10일에도 계속됐다. 일경에 검거되지 않았던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와 학생 김삼도·박태현·박성용·박재헌, 전당포업자 김재병, 농민 이덕주 등은 대구 남문 밖 덕산정시장(현 남산교회 부근)에서 오후 4시에 봉기했다. 3처 교회 신도를 비롯한 200여명의 기독교인과 학생이 만세를 부르며 대한독립을 외치다 무자비하게 해산된 뒤 65명이 붙들려갔다.

◆재판결과

8일과 10일 만세운동가담자 총225명이 검거되고, 계성학교 학생 35명과 대구고보 학생 7명을 비롯해 76명이 실형을 언도받았다. 만세운동의 주모자인 이만집과 김태련은 각각 징역3년과 징역 2년6월형에 처해졌고, 김영서·백남채·최상원·김무생 등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또 권희윤·박제원·최경학 등이 1년6월, 이재인·임봉선·신현욱·허범·박태현 등이 1년, 심문태·박성용·허성도·김삼도 등이 10월, 백기만 등이 징역 6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만세운동 이후

3·8대구만세운동의 여파는 대단했다. 경북전역에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10일 계성·신명여학교, 대구고보가 휴교령에 처해졌지만 다행히 몸을 숨겨 피한 계성학교 김수길·이영식·허성도·이덕생 등 재학생과 졸업생은 비밀결사조직인 혜성단(惠星團)을 조직해 격문을 배포하는 한편 시장철시(撤市)운동, 친일주구배의 반민족행각 규탄, 독립운동군자금 마련국내외만세운동 연계에 나섰다.

대구고보는 만세운동을 전후해 많은 학생이 퇴학을 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맹휴학운동으로 저항했다. 대구고보는 1922년~1936년 입학생 중 50%만이 졸업을 하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지속됐다.

한편 독립만세운동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경북지역 유림 김창숙·장석영·송준필·송규선 등은 경남지역 유림을 규합해 1919년 개회 중인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일명 ‘파리장서사건’을 주동했다. 파리장서 서명자는 총 139명으로 이 중 60여명이 경북출신이다. 대구에선 월배 지역 단양우씨 문중 등이 동참해 옥고를 치렀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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