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련·용해 父子 아버지는 운동 주도·아들은 고문에 절명 ‘3·8만세운동의 영웅’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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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3-01   |  발행일 2013-03-01 제34면   |  수정 2013-03-01
김태련·용해 父子    아버지는 운동 주도·아들은 고문에 절명 ‘3·8만세운동의 영웅’
김태련(왼쪽 위)·용해 부자. 대구시 동구 신암선열공원에 이들 부자가 나란히 안장돼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맑은 물 한 동이 한 동이 길어다 무궁화 잘 길러라. 이 민족의 살 길은 예수뿐이다. 내 민족을 사랑하거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라.”

3·8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태련 의사(1877~1943)의 유언이다. 그는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 어릴 적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20세까지 한학을 배우다 30세부터 남산교회 신도가 됐다. 41세 때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1919년 이만집 목사와 함께 대구만세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3월 하순 장녀의 결혼날짜를 받아두었음에도 거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딸 하나를 둔 24세의 장남 용해는 아버지와 함께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부자는 둘 다 구속됐다. 김용해는 무자비한 일제의 구타와 고문으로 ‘살 가망이 없다’는 일제관헌의 판단으로 가출옥 3일 만에 27일 절명했다. 김용해는 대구만세운동의 첫 희생자다.

김태련은 감옥에서 아들의 죽음을 알고 복역기간 동안 그물을 짜서 3원50전의 돈을 마련했다. 출옥 후 아들의 무덤에 ‘기미년 3월 초하루 의로운 피가 질퍽했나니 아비의 괴롬에 찬 품삯으로 아침햇살 아래 이 돌을 세우노라’는 내용의 비문을 세웠다. 일경이 이를 트집잡자 아들의 이름을 ‘정훈(正勳)’으로 고치면서까지 철거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이들에게 “남아로서의 삶은 조국에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늘 태연히 말했다. 재판 도중 일제가 “피고”라고 부르면 “내 땅을 내어달라고 했는데 무슨 피고인가”라며 저항했다. 재판 도중 주동자를 가려내기 위해 고문을 해도 “하나님이 시켰다”고 일관되게 증언했다.

그는 출옥 후에도 수십 차례나 가택수색을 받았다. 54세 때는 일본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3년간 성경과 한글을 가르치다 강제출국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이후 종탑과 비행기헌납운동을 하는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가 친일에 앞장섰음에도 홀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가정예배로 신앙의 지조를 지켰다.

김씨 부자(父子)의 묘소는 현재 대구시 동구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돼 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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