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甘川 百五十里를 가다 .13] ‘한국 정치사 축소판’ 부항면사무소 쟁탈전

  • 박현주 임훈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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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7-02   |  발행일 2013-07-02 제13면   |  수정 2013-07-02
‘사사오입’ 그리고 총격전… 물에 잠겨있는 웃지 못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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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부항면사무소가 있던 부항면 유촌리는 2012년 부항댐에 물을 담기 시작하면서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부항면 수몰지역 출신인 김재원씨가 면사무소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1950년대는 한국 근대사에 있어 격동의 시기였다. 6·25전쟁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로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김천의 시골마을에도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어닥쳤지만, 성숙되지 못한 국민의식은 각종 문제를 일으킨다. 수십년 전 시골마을에서 발생한 갈등이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많이 닮아있다.


#1.‘사사오입’과 면사무소 입지 투표

김천시 부항면에는 1950년대 자유당 정권의 ‘사사오입(四捨五入)’과 관련한 웃지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사오입’이란 넷 이하는 버리고 다섯 이상은 반올림한다는 셈법이다. 법률 통과를 위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을 때 주로 이용됐던 일종의 ‘반칙’인 셈이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3선 제한 철폐를 위한 불법적 수단으로 쓰인 사례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1959년부터 2년간 지금의 김천시역인 금릉군 부항면 일대에서는 면사무소 이전과 관련, 격렬한 주민갈등이 불거진다. 이른바 ‘면사무소 유치 총격전 사건’이다. 부항면은 면 중앙부를 중심으로 웃면과 아랫면으로 나뉘어진다. 당시 웃면과 아랫면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자신의 마을에 두어야 한다며 크게 다투고 있었다.

부항면사무소의 입지를 둘러싼 주민갈등은 일제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수월한 통치를 위해 조선의 행정체제를 개편했고, 그 여파는 김천에도 불어닥친다. 일제는 1914년 지례현을 네 개의 면으로 나눈다. 지례현은 상·하면, 서·남면으로 나눠졌고, 서면은 부항면이 된다. 요즘 같으면 주민의견을 묻는 공청회가 있었겠지만, 일제의 행정조직 개편은 일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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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부항면의회는 자유당 정권의 ‘사사오입’을 적용, 부항면사무소의 이전을 가결한다. 같은해 12월 유촌리에 있던 부항면사무소는 현재의 사등리로 자리를 옮긴다. 아래 사진은 수몰 전의 부항면사무소 유촌출장소 모습.

일제는 아랫면에 해당되는 부항면 유촌리에 부항면사무소를 짓고, 유촌리는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부항면의 중심이 된다. 1959년이 되자 부항면사무소를 새로 지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면사무소가 낡아 행정업무를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방자치제도를 시행하고 있었고, 부항면의회는 곧 면사무소를 새로 짓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웃면 주민들의 항의가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당시 아랫면에는 6개 동에 370여가구가 살았고, 웃면에는 11개 동에 750여가구가 살았다. 웃면 사람들은 인구가 많은 웃면에 면사무소가 들어서야 한다며 강력하게 항의한다.

결국 부항면의회는 면사무소의 입지를 투표에 부친다. 11명의 면의원 중 7명이 면사무소의 웃면 이전에 찬성해, 면사무소 이전은 부결되는 듯 했다. 당시 면사무소 입지를 결정짓는데는 2/3 이상(8명)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는 조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사무소는 투표결과와는 정반대인 웃면으로 향한다. 당시 부항면의회 의장이 사사오입을 거론하며 면사무소의 이전이 가결됐다고 결론을 내린 탓이었다. 자유당 정권이 사사오입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정권을 연장한 만큼, 면사무소 투표 결과 역시 사사오입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곧 부항면의회는 당시 자유당 실세이자 여성 정치인으로, 김천 지역구 김철안 국회의원에게 면사무소의 이전을 보고한다. 당시 이승만의 양딸이라 불릴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김 의원은 곧바로 면사무소 이전 예산을 확보한다. 결국 1959년 12월31일 부항면 사등리에 새 부항면사무소가 지어졌다. 예산을 따내고 청사 준공까지 2개월 만이었다.


#2.면사무소 때문에 ‘총격전’

사사오입으로 면사무소를 빼앗긴 아랫면 주민들은 허탈감에 빠졌지만, 1960년 4·19혁명 이후 반격을 시도한다. 자유당이 몰락하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아랫면 주민들은 사사오입의 부당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자리를 옮긴 면사무소가 쉽게 돌아올 리는 만무했다. 아랫면 주민들이 정부에 진정을 넣었지만 소득은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아랫면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되찾기 위한 행동에 나선다. 1960년 5월15일 아랫면 주민 600명이 웃면의 면사무소를 습격, 행정서류를 탈취해 유촌리의 창고에 가져다 놓는다.

서류가 없어 면 행정이 마비됐고, 웃면 사람들도 반발한다. 웃면의 몇몇 청년들은 아랫면 주민들을 혼내줘야 한다며 주민들을 끌어모은다.

이후 헛소문까지 퍼지면서 면민 간 갈등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총을 가진 아랫면 사람들이 웃면에 대항하려 한다’는 괴소문까지 퍼진다. 이를 전해들은 웃면 청년들의 반응은 격했다. 웃면 청년 20여명은 부항지서를 습격해 경기관총 두 자루와 소총, 실탄 1천발을 탈취해 무장한다.

1960년 5월25일이 되자 웃면 주민 1천여명이 아랫면의 유촌리를 습격한다. 조용한 시골마을에는 총탄이 빗발쳤고, 아랫면 일대는 쑥대밭이 된다. 아랫면 주민 역시 인근 지례지서에서 총기를 탈취해 대항한다. 면사무소 때문에 주민 간 총격전이 벌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5관구사령관이 군대를 동원해 주민을 진압하고 소요는 일단락된다. 20여명이 큰 부상을 당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당시 총기를 사용했던 주동자들은 도망을 갔거나 붙잡혔고, 행정서류는 웃면의 새 면사무소로 되돌아간다. 이 사건으로 1960년 7월12일 금릉군에는 새로운 조례가 생긴다. 부항면사무소를 웃면인 사등리 516-2번지로 이전하는 대신 부항면 출장소를 둔다는 내용의 조례였다. 면 출장소가 아랫면에 들어서면서 주민갈등도 일단락됐다.

이후 총격전에 가담한 56명은 재판에 회부된다. 웃면과 아랫면에서 각각 28명씩이었다. 이들 중 총기를 발포하거나 지녔던 10명이 징역 1년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지역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사면된다.

김천에서 평생을 살아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66)은 1960년의 상황을 기억한다. 문 위원은 “학교를 다녀오니 감천변 거적때기 위에 사람들이 누워있어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이어 문 위원은 “1950년대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비롯한 여러 이데올로기가 얽혀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성숙되지 않은 민주주의가 주민들의 갈등을 부추겼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아랫면의 유촌리 면사무소 출장소는 1998년 폐쇄됐으며, 2012년 부항댐이 물을 담기 시작하면서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김천=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도움말=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공동기획 : 김천시


빨치산 약탈에 맞서 주민들이 손수 쌓은 ‘부항지서 망루’… 2008년 문화재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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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부항면의 부항지서 망루는 6·25전쟁의 참화를 피하려 부항면 주민들이 직접 지었다. 부항지서 망루는 2008년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405호로 지정됐으며, 2013년 6월27일 현재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김천시 부항면에는 2008년 10월1일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405호로 지정된 부항지서 망루가 있다. 1951년 지어진 망루는 13.3㎡의 면적에 7m 높이로, 주변의 모든 상황을 관찰할 수 있다. 화기진지를 겸해 지어진 망루 꼭대기에서는 기관총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망루는 6·25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부항면 주민들의 노력으로 지어졌다.

6·25전쟁 발발 이후 3일 만에 서울이 무너졌고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대전까지 남하한다. 국군과 경찰은 후퇴를 거듭한다. 1950년 7월경 부항면에는 경기도 가평 경찰부대가 주둔해 있었고, 충남도 경찰국 역시 인근 지례면에 주둔했지만 이들 역시 인민군에 쫓기어 가듯 후퇴를 해야 했다.

이후 북한군은 충북 영동을 통해 부항면으로 들어온다. 당시 북한군의 전략은 나름 체계가 있었다. 부항면에 도착한 북한군들은 민심을 잡기 위한 선무활동에 나선다. 그들은 “우리는 군인이 아닙니다. 해방군입니다”라며 행진을 했고, 민가의 소와 돼지를 잡아먹지 않으며 민심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진퇴양난을 거듭하던 북한군은 패전을 직감한 듯 후퇴를 시작한다. 북한군은 부항면 홍심동에 정규군을 집결시켰고, 백두대간을 통해 북한으로 철수한다. 이후 김천 일대에는 빨치산만 남게되는데, 부항면 일대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얼마전까지 해방군 행세를 하던 빨치산은 약탈자로 돌변한다. 빨치산 때문에 목숨과 재산을 잃는 양민이 부지기수였다. 부항면 일대를 터전으로 삼았던 금광업자들도 빨치산의 먹잇감이었다. 광부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빼앗는 등 빨치산의 악행은 극에 달한다.

하지만 부항면 주민은 잠자코 있지 않았다. 부항면 주민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1951년 여름 부항면 사등리에 망루를 직접 짓는다. 전쟁통에 국가예산이 집행될 리 만무했고, 모든 건축비용은 주민의 부담이었다. 망루는 주민의 자주적 방어시설이었다. 먹고사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어렵사리 구한 시멘트를 손으로 섞어가며 망루를 지어올린다.

망루가 생긴 이후 상황은 한결 나아졌다. 경찰과 민간이 힘을 합쳐 조직화된다. 부항면 청년 200여명은 자발적으로 부대를 꾸려, 빨치산을 토벌하는데 힘쓴다. 1960년대까지 부항면 일대에서는 빨치산이 출몰했다고 전해진다.

글=박현주기자·임훈기자/사진=박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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