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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필자는 한 정책연구소 기관지에 무한 경쟁시대에 도시가 살아남기 위한 문화적 전략에 관한 도구적인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스스로 경쟁하고 만들어가는, 그리고 스스로 안정화시키고 다시 경쟁하며 전복시키며 우성을 향해 치닫는 문화적 진화의 속성을 무시하는 도구적 접근을 통해서 열성유전자가 우성유전자로 돌연변이되어 우리의 도시를, 우리의 삶을 멋있게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착각에 빠져 우습게 말하면 허풍을 쳤던 것이다.
굳이 리처드 도킨스의 ‘다윈주의’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자기준거적 과정을 보여주며 진화해가는 ‘밈’을 무시하고, 생명유전자가 가지는 이기적 진화속성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환경에 적응하는 ‘문화적 변이’를 ‘항상’ ‘스스로’ 초래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지금 이 생뚱맞아 보이는 ‘다윈주의’를 여기에서 얘기하는 것은 문화를 얘기하고 문화정책을 얘기하는 문화 관련 발언자들의 ‘얼치기’ 접근을 반성해 보자는 뜻이다.
‘얼치기’는 너무나 편리하고 쉽다. 문화는 누구나 얘기할 수 있으며 어떤 것도 수용한다. 한마디로 문화는 얼치기인 것이다. 얼치기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치, 이것저것이 조금씩 섞인 것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문화를 얘기하고 문화정책을 얘기해야 하는 문화전문가 또는 전문가인체 하는 자나 문화전문가에게 자문해야 하는 정책결정권자가 얼치기라면 곤란하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문화정책 관련자의 문화철학적 반성과 탐구를 희망한다. 문화에 대한 이해, 예술에 대한 이해, 그리고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쾌적한 삶에 대한 이해, ‘살맛나는 도시’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한 번 차분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고 난 뒤 우리는 시민의 삶에 기반한 우리의 문화정책과 전략과 비전을 전문가적 소양과 책임감으로 살펴봐야 한다. 얼치기 도시문화전략이 정제됨이 없이 내던져지는 일은 자제돼야 하며 전문가적 열린 토론으로 다듬어지길 기대한다. 물론 다양함이라는 문화 자체의 특성상 그렇게 될 리가 만무하겠지만 말이다. 문화의 다양함이 문화정책의 무분별함과는 구분돼야 함은 아무리 강조돼도 모자라지 않다.
한전기 <대구문화재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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