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5> 5·16 군사정변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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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02  |  수정 2024-12-12 10:53  |  발행일 2015-04-02 제7면
5·16 계기로 ‘반골’이던 대구 정체성 ‘보수적’으로 변했다
[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5·16 군사정변
5·16에 대한 영남일보 보도들. 영남일보는 5·16을 하나의 새로운 질서의 태동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으며 이를 지지하기 위해 혁신적인 보도자세를 견지했다.


헌정질서파괴·근대화운동시작
5·16군사정변은 두얼굴 지녀

절대빈곤서 벗어나 경제 부흥
반면 자유민주주의는 큰 상처

역사를 바꾸고 그 자체가 역사가 되는 사건이 있다. 해방 후 70년간 대한민국을 만든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세 가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61년 5·16, 그리고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이 그것으로 각각 건국, 근대화, 민주화라는 한국 근대의 역사적 과제를 상징한다.

5·16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변화는 5천년 역사의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5·16 혁명공약 제4조는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이었다. 1960년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79달러로 아프리카의 가나, 수단과 비슷했다.

한국의 근대화를 경제지상주의로 비판하는 논자도 있다. 욕심만 키우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난을 벗는 것은 당시 우리 국민의 눈물 어린 비원이었다.

우리나라만 아니라 2차대전 후 모든 후진국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빈곤의 정치(politics of poverty)’였다. 하지만 빈곤 극복에 성공한 나라는 거의 없다. 대만, 싱가포르, 홍콩을 우리와 비교하지만 우리나라 규모의 국가에서 성공한 것은 우리가 유일하다. 우리는 그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편이지만 파리정치대학 교수 기 소르망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20세기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이산가족 상봉 장면으로 온 국민을 울린 막순이 스텔라 최씨는 “그 작은 나라가 여기까지 오려면 어떤 일을 겪었을까. 젊은 세대에게 이 영화를 본다는 건 깊은 감사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월절 날 발효시키지 않은 빵을 먹는다. 이집트 노예생활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우리도 지난 70년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5·16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군사정변이자 한국 근대화운동의 시작이다. 그런데 당시 가장 비판적 잡지였던 사상계는 5·16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았다. 5·16군사정변이 비상사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며 ‘4·19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혁명이었다면 5·16군사정변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라고 지지했다.

5·16에서 시작된 경제발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물질적 기반을 만들었고, 마침내 민주화에 성공하여 우리는 근대화의 과제를 완수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상처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1948년 나라를 세울 때 우리 선조들이 가장 잘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이 얼마나 좋은 선택인지는 오늘의 남북한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국민의 자유와 인권에는 한계가 많았다. 대통령도 체육관에서 뽑았다. 국민주권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국민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존중받지 못했다. 다행스럽게 1987년 민주화에도 성공해서 국민주권과 자유를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많은 피를 흘리고 희생이 컸다. 국민주권과 자유를 훼손하는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대구·경북은 5·16 이후 경제발전의 주역들을 다수 배출했다. 그에 따라 지역의 정체성도 바뀌었다. 조선 후기 대구·경북은 남인의 땅으로, 오랜 세월 국정에서 소외되었다. 자연히 반골기질이 강했다. 해방정국에서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세가 강해 1946년 대구 10월사건이 일어났다. 1960년 대구 2·28 학생시위는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다. 하지만 5·16 후 정치적 정체성은 비판과 저항보다 국정을 주도하는 보수적 입장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최근 또 한번 정체성이 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4년 대구 관련 뉴스 빅데이터를 보면, 대구는 전국적 이슈와 상당 정도 단절되어 있었다. 일례로 세월호 참사는 같은 시기에 일어난 대구시 화재사건보다도 빈약하게 다루어졌다. 일반적 국민 정서와 상당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빈약하다. 작년 경북의 지역내총소득(GRNI)은 1.6% 감소했다. 대구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은 전국 꼴찌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왜소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50년간 대한민국의 기적을 이끈 정신과 기상이 부활되기를 기대한다.

김영수<영남대학교 교수>

[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5·16 군사정변
5·16 군사 정변 직후, 박정희·이낙선 소령, 박종규 소령 등이 중앙청 앞에 서 있다.
[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5·16 군사정변
5대 대선 현수막이 내걸린 거리를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5·16 군사정변
병영화 한 고려대 전경.



4·19땐 ‘민심이 천심을 움직이다’
5·16땐 ‘軍, 부패정권 타도’ 사설

■ 영남일보에 비친 4·19와 5·16

1960년의 시작은 자유당의 장기 집권 야욕에 대해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저항으로 점철되었다.

그 한 사건이 2·28의거였고 그 다음이 3·15 부정선거에 대한 마산 데모 사건이었다. 그리고 4·19 혁명은 자유당 독재정권을 붕괴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영남일보 1960년 4월19일자는 조간 1면에 전날 있었던 고대생들의 데모를 톱 기사로 보도했다. 동시에 고정란 카메라 토픽스에서는 고대생들의 데모 장면과 함께 ‘진실을 부르짖는 민주의 기둥들’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이날의 석간 사설에서는 ‘작은 구멍을 메꾸기 위해서 더 큰 구멍을 파는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정부 당국자들이 실정을 인정하지 않고 분출하는 민중의 울분을 강압적으로 저지하려는 처사는 자멸의 길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4월19일 서울지역에 이어 대구를 비롯한 3개 대도시에서 비상계엄령이 내려 모든 신문은 사전 검열을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영남일보는 이에 굴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진실을 알리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19일에 있었던 경북대생들의 데모를 비롯해 청구대, 대구대, 효성여대의 데모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런 노력 역시 사전 검열에 의해 제한됐다.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잘려 나간 기사, 군데군데 덜어내 문맥을 알 수 없는 자유성을 비롯한 고정 칼럼들, 전문이 삭제된 빈 사설들은 당시의 노력을 엿보게 하는 흔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쓰인 자유성의 다음과 같은 일부는 영남일보가 4·19 혁명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엿보게 한다.

“이들 젊은 학도들은 순결하다. 아무 사심이 있을 리 없다. 권력에 대한 침흘림도 이권에의 추구도 없다. 돈과 계집에의 추한 관심도 명예심에 향수도 없다. 하물며 부질없는 소영웅심리가 있을 까닭이 없다. 이들에게는 오직 희망에 찬 내일이 있을 뿐이다. 찬란한 태양-축복된 아침이 있을 뿐이다.”

영남일보는 4·19 혁명이 순수한 동기와 미래를 위한 용감한 행동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혁명의 성공을 찬란한 태양과 축복된 아침으로 예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했다는 기사가 실린 4월29일의 사설에서는 ‘민심이 천심을 움직이다’라는 제목으로 4·19 혁명의 성공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61년 5월16일 영남일보 석간에는 ‘통일추진협의체 구성을 환영한다’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이 사설은 61년 벽두부터 불거져 나온 남북의 통일과 교류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 주된 내용은 통일이 개인이나 한 정당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일이기에 각계각층의 사람이 망라되는 통일 협의체를 구성해야 하며 이 협의체는 자주적인 역량을 갖고 통일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설은 상당히 혁신적인 시각이었다. 4·19혁명이 가져다준 우리 자신의 민주적 역량을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5·16정변 다음날인 17일자 영남일보 조간 1면에는 ‘군사혁명위 정권을 완전 인수’라는 제하의 톱 기사와 함께 ‘국군은 드디어 부패한 정권을 타도하였다’라는 사설이 실렸다. 석간 3면의 가십난인 뒷골목에는 군사정변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16일 쿠데타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반향을 잘 되었다라고 찬사를 던지면서 은근 중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 군사혁명의 성격을 궁금히 여기고 있다.”

실제로 당시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분위기는 쿠데타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장면 정권을 수호하려는 사람은 드물었고, 쿠데타를 통해 기득권 청산의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 제3 세계에서 발생한 군사 쿠데타의 대부분이 민족주의적 개혁적 성격을 지닌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영남일보 역시 군사 쿠데타를 하나의 새로운 질서의 태동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으며, 이를 지지하기 위해 혁신적인 보도자세를 견지했던 것이다.

5·16 군사정변을 계기로 군부는 한국 정치 무대 전면에 등장, 이후 30여년동안 한국의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군사문화의 사회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자고 일어나니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처럼 한국의 현대사를 송두리째 바꾼 날이었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자료조사 조사팀 박성희·이경봉 인턴기자<경북대 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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