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를 통해 본 현대사] <6> 경부고속도로 건설

  • 이은경 심지영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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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16   |  발행일 2015-04-16 제9면   |  수정 2015-04-16
박정희, 1965년 獨 아우토반 달리면서 “바로 이거다, 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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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다양한 상징 의미를 지니는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7일 준공됐다. 단일 노선으로 동양 최장인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과 부산을 4시간20분 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서울-부산이 일일 생활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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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왼쪽),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오른쪽)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1969년 대구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서는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당위성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요즈음 학교 교실에서 벌어지는 토론 수업의 한 장면이 아니라 휴식시간 막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이 벌인 자발적인 토론이었다. 지방의 고등학생들까지 토론을 벌일 정도의 주제였으니 정치권에서 치열한 논쟁거리가 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당시 토론에서 나는 야당이 취한 입장과 마찬가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논지를 전개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해야 할 정도로 물동량도 많지 않은데, 없는 돈을 들여가며 굳이 고속도로를 건설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경부선 철도를 잘 활용하면 물동량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지 2년이 지난 72년의 전국 자동차 대수가 12만대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경제개발의 모델이었던 서독 방문중
조국근대화 위해 인프라 필요성 절감

서울∼부산 428㎞ 2년 5개월만에 완공
현대건설 정주영 기상천외 공법 화제

짧은시간 압축성장의 상징인 동시에
빨리빨리 문화 확산으로 각종 비극 낳아


박정희 대통령은 왜 없는 돈을 들여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자 했을까.

그는 1965년 12월 서독 방문길에 오른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원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덧붙여 제2차세계대전 패전의 잿더미를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의 경제발전 노하우를 배우고 싶은 열망도 있었을 것이다. 조국 근대화를 꿈꾸었던 그에게 서독은 경제개발의 모델이었다. 라인강의 기적을 한강의 기적으로 바꾸어 보고자 하는 열망이 가슴에 가득했으리라. 그는 본에서 쾰른에 이르는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리면서 기적의 출발이자 상징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구상을 했을 것이다.

1968년 2월1일에 착공하여 70년 7월7일에 준공한 경부고속도로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완공된 고속도로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 만큼 경부고속도로는 광복 후의 한국 현대사에서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문화적 풍토로 지적하는 ‘빨리 빨리 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28㎞의 고속도로를 불과 2년5개월 만에 건설했다는 것은 ‘돌격대’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건설 공정을 중간 중간 철저하게 점검하면서 건설했다면 그 짧은 기간에 건설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돌격대식으로 건설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은 5·16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제1의 혁명공약으로 반공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근대국가다운 국가를 만드는 일이었다. 국가재건최고위원회라는 기구를 둔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정식 출범했지만 50년대 국가 예산의 많은 부분은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많을 때는 무려 절반을 넘기도 했다. 국가 재정에서 자립적인 기반을 갖추지 못한 국가가 과연 국가다운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서구 사회를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국가의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하는 일은 무엇보다 긴요한 일이었다. 국가 총동원을 통해 수도인 서울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기 위한 고속도로라는 인프라를 하루 빨리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고속도로는 조국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자 그 상징인 셈이었다. 추풍령 휴게소에 세워져 있는 준공기념탑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새겨진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에의 길이다”라는 문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1968년에 착공한 경부고속도로는 본래 71년에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공기를 1년 앞당겨 70년 7월에 완공되었다. 건국 이래 가장 큰 공사라고 했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공기를 단축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현대건설의 정주영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공기를 맞춰냈다. 그는 이미 1965년 태국 고속도로 건설공사에서 악천후의 기후조건 속에서도 공사감리를 맡은 외국인 감독관의 예측을 비웃듯 공기를 맞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부고속도로 공사에서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진행했다. 짧은 시간에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것도 ‘할 수 있다’는 도전정신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조국근대화의 상징으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한국 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음도 부인할 수 없다. 군의 공병대를 투입하여 돌격대식으로 공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부실공사의 원조라는 부정적인 낙인도 찍혔다. 공기 단축의 ‘빨리 빨리 문화’는 과정을 무시한 채 목표달성이나 성과에 집착함으로써 목표우선주의의 여러 폐해를 낳았다. 목표우선주의는 사회 곳곳에 비정상을 정상적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 공기 단축에서 유래한 속도전은 한국 사회의 일상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는 비극을 낳았다. 심사숙고하는 것을 비효율로 인식하는 사회에서 성찰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 결과 곳곳에서 터진 건설현장의 참사는 한국 사회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토목공사로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한국 현대사를 특징지은 토건국가의 시작이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사항이다. 압축적 경제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토목공사였다.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연구개발은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기 힘들기 때문에 역대 정부가 쉽게 손대는 것이 토목공사였다. 사회인프라가 절대 부족했던 시절에는 토목공사가 가시적 성장의 상징이자 장기적 성장의 기반으로 역할할 수 있었지만 어느 정도 인프라가 갖추어진 이후의 토목공사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사회적 낭비로 이어졌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백승대<영남대 사회학과 교수>


고속도로 北으로 연결되지 못한 아쉬움에 ‘잘린 허리 새삼 슬퍼진다’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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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영남일보 1970년 6월28일자 1면 기사로 소개된 경부고속도로 완공 소식. 서울과 부산을 4시간20분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서울-부산이 일일 생활권이 됐다면서 도시와 농촌간 격차를 줄여줄 것이라고 보도했다. ② 1970년 7월7일 대구종합운동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개통기념식을 보도한 지면. ③ ‘이 길은 꿈의 길 번영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고속도로 개통과 관련해 실은 화보.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을 교외주택단지의 개발, 체화없는 계획적 수송, 풍요한 농촌, 새로운 자원개발, 신선한 채소의 출하, 내륙공업단지 조성, 관광 진흥, 해운과의 직결 등 8가지 기능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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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이 공개한 1970년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준공식 모습.

영남일보에 비친 경부고속도로

1970년 6월28일자 1면 기사엔
‘단일노선 동양 最長…’보도
도시-농촌 격차 해소 기대도

70년 7월7일 대구서 개통식땐
‘이 길은 꿈의 길 번영의 길’ 화보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이 1970년 7월7일 대구종합운동장(현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구가 경부고속도로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대구·경북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철도를 중심으로 이어지던 서울과 부산이 대구와 고속도로로 이어지게 된 것은 대구·경북의 새로운 전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당시로서는 첨단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전자산업단지가 구미에 들어서게 된 것도 경부고속도로라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통일호를 타고 5~6시간이나 걸리던 불편함이 고속버스로 3시간30분이면 수도 서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편리함으로 대체된 것도 경부고속도로 덕분이었다.

그러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는 로마 속담처럼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이어진 서울 중심의 고속도로 건설은 모든 길이 서울로 통하는 수도권 집중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대구·경북 발전을 촉발한 계기가 된 동시에 서울 집중과 지방 약화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었던 셈이다.

영남일보는 1970년 6월28일자 1면 기사로 착공한 지 2년5개월 만에 완공한 총 428㎞ 길이의 경부고속도로 완공 소식을 실었다. 단일 노선으로 동양 최장인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1일 착공해 총 429억7천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70년 7월 준공됐다. 서울과 부산을 4시간20분 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서울~부산이 일일 생활권이 됐다면서 도시와 농촌간 격차를 줄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축하하는 한편 서울과 부산은 한번에 주파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위(북한)로는 갈 수 없어서 안타깝다는 내용으로 ‘잘린 허리 새삼 슬퍼진다’는 제목의 만평도 함께 실었다.

7월7일에는 대구종합운동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개통기념식을 보도했다. 영남일보는 ‘이 길은 꿈의 길 번영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고속도로 개통과 관련한 화보를 실었으며 “가장 빠르게 가장 값싸게 뚫린 조국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의 물질적 의의도 크지만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무한한 의지력을 가졌음을 시사하는 정신적 의의가 더 크다”고 강조한 박 대통령의 치사를 실었다. 화보에서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을 교외 주택단지의 개발, 체화없는 계획적 수송, 풍요한 농촌, 새로운 자원개발, 신선한 채소의 출하, 내륙공업단지 조성, 관광 진흥, 해운과의 직결 등의 8가지 기능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자료조사 조사팀 박성희·
심지영 인턴기자(경북대 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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