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32] 함양 풍천노씨 노참판댁 ‘사초국수’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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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9-10   |  발행일 2015-09-10 제22면   |  수정 2015-09-10
조선 바둑계 ‘國手’ 사초 노근영, 手談(수담) 나눈 손님에 국수로 소박한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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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참판댁에서 사초 노근영이 손님들에게 내어놓던 ‘사초국수’(위쪽)와 다과상. <두레씽크푸드 제공>


◇사초국수
닭·멸치 육수에 부추·호박 고명 얹어
소고기·황백지단·석이버섯 등도 올려
백김치·산적꽂이로 상차림에 곁들여

 

◇다과상
오미자茶나 준시 넣은 수정과 내놓아
약과·율란·조란·부각 등 함께 차려내
끈적함 안 묻도록 솔잎 끼우는 센스도

 

경남 함양의 양반마을로 유명하던 개평마을은 조선의 대표적 선비 일두 정여창(1450∼1504)을 배출한 하동정씨와 함께 풍천노씨가 일궈온 집성촌이다. 이 마을이 낳은 풍천노씨의 인물로는 바둑으로 일세를 풍미한 사초(史楚) 노근영(1875~1945)이 유명하다.

개평마을에는 일두 정여창 고택을 비롯해 하동정씨 고가,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등 고택이 많다. 이 고택들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은 노참판댁 고가의 안채로 추정되고 있다. 노근영은 바로 이 노참판댁의 인물이다.

노참판댁 고가는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만 남아 있다. 노참판댁이라 불리는 연유는 노근영의 증조부인 감모재(感慕齋) 노광두(1772~1859)가 만년에 낙향해 살았던 집으로, 노광두가 호조참판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다.

노광두는 매우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양 지방이 심한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어 주민들의 생계가 위협을 받자, 임금에게 주민들의 조세를 감면해줄 것을 상소해 조세를 크게 탕감받게 된 일도 있었다. 당시 인근 주민들은 노광두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재물을 갖다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러자 주민들은 논의 끝에 사랑채를 지어주기로 하고 실천에 옮겼다. 노참판댁 사랑채는 그렇게 해서 건립된 건물이다.

이 사랑채를 비롯한 노참판댁 고가는 조선 말기 우리나라 바둑계 1인자였던 노근영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한데, 그가 바둑에 한창 빠져있던 시절에 이 고가는 집문서를 걸고 내기 바둑을 자주 하는 바람에 등기상 집 주인이 스물일곱 번이나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참판댁에는 바둑 고수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등 손님들이 전국에서 많이 찾아들었다. 이런 손님들에게 노참판댁 며느리가 마련해 간편하게 대접하던 대표적 음식이 있었는데, 바로 소박한 국수였다. 노근영의 성품이 드러나는 소박한 음식인 이 국수는 ‘사초국수’라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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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참판댁 사랑채. 세금을 탕감케 해준 노광두(노근영 증조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주민들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국수(國手) 집에서 손님에게 내어놓은 사초국수

노근영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절, 바둑으로 당시 국민들의 마음을 그나마 후련하게 했던 인물이다. 부잣집에 태어난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성품이 어질고 물욕이 없었고 항상 능력껏 주위에 베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천하의 호인’이라 불리기도 하고, 항상 웃는 얼굴로 다녀서 ‘조선의 점잖은 사람’이라는 별명도 붙었다고 한다.

그는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큰 변혁의 시기에 공부나 관직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바둑을 탈출구로 삼게 되었다. 1904년경 백남규를 만나 바둑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그는 스승과 함께 뜻을 모아 나라에 대한 사랑을 바둑으로 승화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바둑 고수 기타니 미노루 8단, 혼다 슈고 초단 등을 만방으로 이긴 그는 조선 바둑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프로기사가 없던 시절, 그는 조선 바둑계의 국수(國手)로 불리었다. 며느리의 산후 조리를 위해 보약을 지으러 나갔다가 바둑 친구를 만나 약을 손에 든 채로 서울로 바둑 유랑을 떠났다는 등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패싸움을 즐겨 ‘노(盧)패’ ‘노상패’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의 바둑 명성이 전국에 소문이 나면서 노참판댁에는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바둑을 두면서 술을 마실 수는 없었기에 손님이 찾아오면 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국수를 내어오게 했다. 닭이나 멸치로 육수를 만들고, 고명으로는 부추(봄)나 호박(여름)으로 푸른색을 냈다. 그리고 볶은 소고기나 황백지단, 석이버섯 등을 올린 국수를 시원한 백김치와 산적꽂이를 곁들여 상을 차렸다. 산적은 소고기, 가래떡, 파, 당근, 우엉, 느타리버섯 등으로 구워냈다.

사초국수와 함께 노참판댁의 약과는 특히 그 맛으로 유명했다. 개평마을 일대 그 맛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다과상은 차와 함께 약과, 율란과 조란, 부각 등이 올랐다. 율란과 조란은 솔잎을 끼워넣어 손에 끈적한 것이 묻지 않도록 했다. 바둑 두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하는 섬세함을 보여준다. 차는 오미자차를 내기도 하고, 겨울에는 임금님에게 진상했다는 준시를 넣은 수정과를 내놓았다.

◆사초 노근영은

사초 노근영은 성품 그대로 화려한 상차림은 멀리 하고, 찬을 많이 올리면 야단을 치기도 했다. 3첩 이상은 올리지 못하게 했다. 평상시에는 청국장이나 된장찌개, 겨울에는 무국이나 시래기국 등 소박한 음식을 즐겼다. 그리고 다진 방아와 풋고추, 고추장, 된장을 넣어 반죽한 다음 아궁이에서 숯 몇 개를 꺼내 석쇠에 은근하게 구워낸 장떡을 좋아했다. 그는 서울에서 손수 구입한 석쇠를 함양 집으로 보내 사용하라고 하는 등 자상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물욕이 없고 어려운 이를 보면 베풀기를 좋아한 그의 성품 대로 집안의 음식 역시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정갈하게 준비하도록 했다. 손님이 끊이지 않아 집안에는 항상 약과와 유과, 부각 등을 넉넉하게 만들어 항아리에 보관하게 했다. 우물에는 여러 개의 통을 넣어 식혜, 열무김치 등을 시원하게 보관하며 신선한 음식을 내놓을 수 있도록 했다.

노근영은 전국을 누비며 바둑대국 여행을 할 때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 대신 누더기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한번은 동네 젊은이가 점심을 초대해 가보니 너무 가난해 고봉으로 담긴 꽁보리밥과 김치, 풋고추가 다였다. 꽁보리밥에는 파리떼가 몰려들었지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식사를 즐겁게 마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리고 내기 바둑으로 돈을 따더라도 대부분 나눠주었다고 한다.

조선 팔도로 여행을 자주 다녔지만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착은 깊었다. 1900년부터 함양에서 명망 있는 유지 19명과 시회를 열었고, 1932년에는 상림 숲에 십구인정(十九人亭, ‘초선정(樵仙亭)’이라고도 함)을 건립해 매년 19인의 시회를 열었다.

2008년에는 사초노근영선생사적비가 함양 개평마을에 세워졌고, 이 해부터 매년 함양에서는 노사초배전국아마바둑대회가 열리고 있다.

노근영은 국내 바둑계의 1인자로 전국을 유랑하며 바둑을 두었고, 더러는 집문서·논문서를 걸고 큰 내기바둑을 두었다. 바둑에 지면 노참판댁 고가가 가차압되고, 이기면 가차압이 풀리기를 반복했는데 그런 연유로 무려 스물일곱 번이나 이 집의 등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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