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1부>] 4. 강영복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 총장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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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2-17   |  발행일 2016-02-17 제9면   |  수정 2022-05-18 17:46
공부 못하는 한인에 ‘배움 등불’… 러시아 유일의 사립대 세워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 강영복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 총장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학교 전경.<강영복 총장·하태균 회장 제공>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 강영복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 총장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와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학이 지난해 4월 사할린에서 개최한 ‘소통 토크’ 행사 후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강영복 총장·하태균 회장 제공>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 강영복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 총장
2012년 열린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식에서 강영복 총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강영복 총장·하태균 회장 제공>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 강영복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 총장


지난달 31일 경기도 김포시의 한 호텔 연회장.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레스토랑 ‘랑데부’를 운영하는 최정순여사의 고희연이 열렸다. 최 사장은 유즈노사할린스크 최대 호텔 ‘가가린’의 권행자 사장 등과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한인여성기업인으로 손꼽힌다. 2011년 세계한민족여성재단(KoWinner)이 선정한 ‘세계 한인 여성 사업가 25인’에도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최 사장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해 사할린과 인천, 안산 등지에서 100여명의 한인들이 이날 행사장을 찾았다. 그 중에는 러시아 유일의 사립대학교인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학교(YuSIEPI)를 세운 강영복 총장(72)도 있었다.

“가난 피하려면 공부만이 살길”
 어릴 적부터 유별난 학업열정
 1991년 꿈에 그리던 대학 설립
 통신강좌 등 21개 학과 개설
  해외 대학과의 교류도 활발

◆‘아주 바빴던’ 사할린의 세월

연례없는 맹추위가 요란스럽던 지난 달, 때맞춰 귀국한 강 총장은 한국이 사할린보다 더 춥다며 연신 옷깃을 여미었다. “사할린과 달리 한국의 겨울은 뼛속이 시리는 추위”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총장님 뼈가 러시아 뼈라서 그래요.” 동행한 하태균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장이 웃으며 농담을 한다.

하 회장이 대표를 맡고 있는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는 1994년부터 사할린과 교류의 물꼬를 텄으며, 2008년 이후부터는 매년 정기적인 사할린 동포 위문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학교와는 자매결연도 하고 있다.

한국의 아리랑과 러시아 민요 카추샤가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뒤섞여 흘러나오는 가운데 인터뷰가 시작됐다.

“사할린에서 우린 아주 바빴어요, 아주.” 사할린 한인들의 ‘바쁘다’는 말은 ‘힘들다’는 뜻이다.

강 총장의 아버지 강재성씨는 28세 되던 해 전북 군산에서 강제 징집되었다. ‘가라후토(사할린) 보국대’라는 완장을 차고 부산, 시모노세키, 홋카이도, 하쿠다테를 거쳐 사할린의 대표적인 탄광촌 토마리로 끌려왔을 때 아내 명경애씨는 만삭의 몸이었다. 그 배속의 아이가 바로 강 총장이다. 강 총장의 아버지는 평생 탄광촌에서 일했다. 식사라고는 보리쌀이 보일락말락 섞인 콩밥 한 공기. 그걸 먹고 하루 12시간의 중노동을 했다. 갱내에서 한 시간 일하고 바지를 잡으면 땀이 물처럼 주루룩 흘러내렸다. 고된 노동이 화근이었을까. 아버지는 환갑을 겨우 넘기고 돌아가셨다. 꿈에 그리던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일찍 죽으면 억울하니 악으로 살아야지. 죽은 몸뚱이라도 고향땅에 묻히려면”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어머니 명씨는 2000년 영주 귀국했다.

말할 수 없이 ‘바쁜’ 생활이었지만 강 총장의 3형제는 모두 번듯하게 대학을 나와 교수로 일하고 있다. 잡일을 하거나 집에서 기른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파는 일 정도밖에 할 수 없었던 한인 1세대들은 아들과 딸이 자신처럼 힘들게 살기를 원치 않았다. 사할린 한인의 자식에 대한 애정과 교육에 대한 열망이 유별났던 까닭이기도 하다.

◆공부만이 살길이었다

하지만 공부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52년 4월 28일 발표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으로 사할린 한인은 졸지에 무국적자가 되었다. 이전까지 러시아에서 한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무국적자가 된 한인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다.

어릴 적부터 유달리 총명했던 강 총장은 돌린스크 조선학교 고교 과정을 2년만에 졸업했다.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야 했지만 허락을 받을 수 없었다. 무국적자는 거주지 제한이 있어 러시아 내에서도 거주지 기준 4㎞ 이상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사실상 살고 있는 행정구역 밖으로 못 벗어났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 본토로 공부를 하러 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사흘 밤낮을 꼬박 관공서 앞에서 진을 치고 식음을 전폐한 채 졸라댔다. 그렇게 모스크바국립공업대학 전기과에 입학 시험을 치러 갔다. 당국의 허가가 늦어져 모스크바에 당도했을 땐 시험이 이미 끝나 있었다. 그대로 사할린으로 돌아올 순 없었다. 모스크바 가는 차 값만 달랑 챙겨서 떠난 터였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거니와 기필코 모스크바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시험이라도 치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런 강 총장이 불쌍했든지 아니면 가소로웠던지 다행히 학교에서는 시험을 치게 해주었다.

“하도 난리를 치니 시험이나 원없이 쳐보고 돌아가라며 시험지를 던져주더군요. 수학과 물리를 푸는데 옆에 있던 교수가 깜짝 놀라더군요. 워낙 점수가 월등해서인지 입학을 허락받았습니다.” 그가 졸업하던 1963년 사할린 전체에서 본토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그를 포함해 3명이 전부였다.

◆러시아 최초 사립대 문열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오직 공부를 해서 성공하기를 꿈꾸던 강 총장이 대학을 세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온갖 차별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나마 공부 밖엔 길이 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한 탓이었다.

“한인들은 차별 때문에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나마 학문의 영역에서는 차별이 덜 했습니다. 머리는 있으나 형편이 안돼 공부를 못하는 한인들을 보면 속상하고 자존심 상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강 총장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개방 물결을 타고 1991년 평생 꿈꾸던 3년 과정의 사립대학을 설립한다. 러시아 최초의 사립종합대학일 뿐만 아니라 한인이 세운 첫 사립대였다. 살고 있던 집과 타고 다니던 자동차까지 탈탈 털어 아내도 모르게 은행 대출을 받았다. 당시 은행 이자는 220%에 육박했다.

외국인이 세운 대학에 대한 질투와 모함도 적지 않았다. 매년 정부 평가를 받을 때마다 투서가 평가기관에 날아들었고, 정보기관 내사까지 받았다.

하지만 강 총장의 뚝심은 사할린경제법률정보대학교를 러시아교육국이 실시하는 평정기준을 다섯 차례나 통과시켜 교육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 글로벌 시대에 부응하는 대학으로 발빠른 변신을 하고 있으며 통신강좌를 비롯해 21개의 전문학과를 갖춘 사할린 대표 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모스크바국립출판종합대학, 바이칼경제법률정보대, 이르쿠츠크국립언어종합대학 등 러시아 유명대학의 분교를 자체 개설하였으며 한국의 동서대, 중국의 쯔질린 및 장춘공예학교와의 상호 학문교류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최근에는 러시아경제아카데미 대학원 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러시아 교육계는 강 총장에게 사할린한인 공훈(교육) 영웅 1호라는 영광을 부여했다. 강 총장은 2005년에는 한인의 위상을 높이는데 이바지한 공로로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글·사진=김포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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