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1일은 대구시민의날…2월21~28일은 대구시민주간] (상) 왜 2월21일로 정했나…역사적 배경이 된 국채보상운동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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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13   |  발행일 2020-02-13 제13면   |  수정 2020-02-13
"담뱃값으로 국채상환" 결의…첫 연설때 주사 월급 11년치 모여

남일동부인회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는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남녀구분이 없다며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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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수창초등 인근 광문사터. 국채보상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이 조성돼 있다. 최근 광문사 자리가 수창초등 인근이 아닌 경상감영공원 인근 경북도 관찰부 내 취고수청이라는 주장이 나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올해부터 변경된 대구시민의 날(2월21일)이 일주일여 앞으로 다가왔다. 신종 코로나 탓에 기념식을 연기하는 방안도 검토됐으나 행사 규모를 줄여 예정대로 진행된다. 38년 만에 시민의 날을 새로 선포한다는 상징성을 감안한 결정이다. 지난해까지 대구시민의 날은 직할시로 승격된 1981년 7월1일로부터 100일째 되는 '10월8일'이었다. 대구 정체성과 연관성이 적은 데다 역사적 상징성마저도 희박했다. 이에 대구시는 2018년 8월부터 전문가포럼, 시민 설문조사, 토론회, 시민원탁회의 등을 통해 시민 선호도가 가장 높은 국채보상운동 기념일을 시민의 날로 변경하고, 2·28민주운동 기념일까지 시민주간으로 행사를 이어가기로 했다.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두 운동이 대구시민의 날·시민주간으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영남일보는 대구의 정체성이자 시민정신인 국채보상운동과 2·28민주운동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다룬다.

◆일제의 국권침탈 야욕과 차관 도입

일제는 1894년 갑오동학혁명을 계기로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욕을 본격화했다.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친일정권을 수립한 뒤 갑오개혁까지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차관(借款)공여를 통해 조선의 경제를 파탄에 빠트려 식민지화를 앞당기려 했다.


日 차관 공여, 원금만 1천650만원 달해
1907년 1월29일 광문사서 운동 실체화
2월21일 대구군민대회서 취지서 낭독
대구의 정신이 '시민의 날' 로 이어져



하지만 조선의 경제상황은 피폐했고, 결국 차관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두 차례에 걸쳐 차관한 돈이 각 30만원, 300만원이었다. 일제의 차관 공세는 지속됐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고문을 파견해 간접통치를 시작하면서 더욱 노골화됐다. 일제는 1905년 대한제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한다는 미명(美名) 아래 화폐정리채 300만원, 채권 상환 등을 이유로 200만원의 차관을 들이도록 했다. 또 화폐개혁에서 비롯된 금융공황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150만원을 또 빚지게 만들었다.

이듬해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교육제도의 개선과 금융기관의 확장 정리 등 갖은 명목을 갖다 붙여 무려 1천만원에 달하는 차관 도입을 강요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2년여 사이 원금 1천650만원에 달하는 채무와 상당한 액수의 이자를 떠안게 됐다. 1907년 2월, 대한제국은 약 350만원의 빚을 갚았으나, 남아있는 1천300만원의 국채는 당시 국가 재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당시 1천300만원은 대한제국 1년치 예산에 버금갔다. 일제가 차관 상환을 요구하면 나라 땅을 팔아 갚아야 할 절박한 처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담배를 끊어서라도 국채를 갚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민초들의 움직임이 일었다. 국민의 힘으로 차관의 족쇄에서 벗어나자는 운동이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움텄다. 1907년 1월29일의 일이다.

당시 광문사는 대구경북지역 지식인과 자산가, 관료 등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출판사 겸 인쇄소였다. 각종 실학서에 대한 저술과 발간, 지역내 각 학교에 사용될 교과서 출간 등이 주된 업무였다. 이와 더불어 신학문을 도입해 자강의식을 일깨우는 데도 앞장섰다. 특히 사내에 '광문사문회(廣文社文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독서와 시작(詩作) 교육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도 전개하던 선각단체였다. 이날은 광문사문회를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확대하고, 그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 특별회가 열린 터였다.

특별회에서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1866~1920)는 "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내주어야 함은 불을 보듯 뻔한 일, 두 눈 뜨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김광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가 경성의 경찰치안권을 장악하자 경무관 자리에서 물러났고, 고종황제 앞으로 '친일배와 내정부패를 탄핵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고군산도로 유배를 다녀온 인물이었다.

이어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1850~1913)이 김광제의 발언을 거들었다. 그는 "우리 힘으로 국채 1천300만원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는 겁니다.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단 석 달 동안만 끊어도 그 대금이 모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으면 됩니다"라면서 "그런 의미에서 우선 나부터 의연금으로 800원을 내놓겠소"라고 강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서상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찬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회의에 참석한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자 김광제는 국채보상발기회 연설을 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실체화된 순간이었다.

연설문의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금일(今日) 문제(問題) 국채(國債)의 보상(報償)이로 본사(本社)에서 발기(發起)니, 본사(本社)의 형편(形便)부터 강 설명(說明)하고 본사(本社)를 광문사(廣文社)라 명칭(名稱)야. …중략… 제일패망(第一敗亡)할 와 제일시급(第一時急)한 바 일천삼백만원(一千三百萬圓)의 국채(國債)올시다. …중략… 발기자 본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으로 자서(自書)하오리다. 본인(本人)부터 흡연(吸煙)의 제구(諸具)를 만장제군전(滿場諸君前)에 파쇄(破碎)오며 오등(吾等)의 토지(土地)와 신체(身體)가 전집중(典執中)에 현재(現在)한지라. …중략… 황천(皇天)이 감응(感應)여 전국인민(全國人民)으로 일심합력(一心合力)야 대사(大事)를 순성(順成)고 민국(民國)을 보존(保存)케 하옵소서."

연설 이후 다른 회원들도 모금에 동참했고, 순식간에 2천여원이 모였다. 당시 신문 한 달 구독료가 30전, 주사 월급이 15원, 쌀 한말이 1원80전이던 것과 비교하면 이날 모인 금액은 실로 상당한 액수였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대구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선 국채보상운동이 3·1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나아가 IMF 환란 당시 '금모으기 운동'으로 이어진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2월21일, 피어오른 국채보상운동의 불꽃

광문사 회동 이후 20여일 뒤인 '2월21일' 국채보상운동이 비로소 본격화됐다. 김광제와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을 중심으로 한 회원들이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 대구상공회의소의 모태)에 한데 모여 단연회를 구성했다.

말 그대로 '끊을 단(斷)' '연기 연(煙)', 담배를 끊어 국채를 보상하자는 뜻이었다. 단연회 설립과 동시에 500원을 모았다. 이어 이들은 대구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운동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열었다. 당시 동장군이 기승을 부린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발 디딜 틈 없이 군중이 응집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음은 물론, 직업 또한 다양했다. 열렬한 호응 속에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가 낭독됐다.


전국 각지에 지역별 국채보상회 설립
통합기구까지 설치…범국민운동 발전
독립운동·IMF 금 모으기 운동 밑거름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운동' 의미도



"지금 백성과 나라가 위급한 때이거늘, 결심도 계획도 없이 다만 팔짱 끼고 우두커니 앉아서 멸망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지금 국채 일천삼백만원이 있은즉, 우리 대한의 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갚으면 나라는 보존될 것이나,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하나 지금의 국고로는 변제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2천만 민중이 석 달을 정하여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각 사람으로부터 매월 20전씩 거둔다면 충분히 모을 수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우리 대한 신민 여러분은 이를 곧 말과 글로 서로에게 알리어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십시오. 이로써 강토가 유지된다면 이 이상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불꽃은 바람을 타고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졌다. 대대적인 캠페인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이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전국 각지에 지역별 국채보상회가 설립되면서 의연금을 모으는 등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때 설립된 보상소가 무려 27곳이나 됐다. 의연금 관리를 위한 통합기구도 설치돼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일제의 핍박으로 끝내 대국민운동은 좌절됐지만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됐고, 1997년 IMF 환란 시기에는 금모으기 운동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은 국민 스스로가 맨손으로 호국 정신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은 순수한 기부를 통해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실천한 셈이다.

또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비롯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운동으로서의 의미도 있다. 유네스코가 2017년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이 같은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의 시작과 중심에 우뚝 섰던 대구의 정신은 '시민의 날'로 이어지고 있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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