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봄은 올 것인가] <상> 군부독재에 맞선 60년 민주화 투쟁...무차별 폭력에도 저항의 '세 손가락' 치켜들었다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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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3-24   |  발행일 2021-03-24 제22면   |  수정 202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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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총선에서 패배한 미얀마 군부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지난 2월1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미얀마 국민들은 쿠데타 당일부터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며 군부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시위에 나선 미얀마 국민들이 독재에 저항하고, 대의를 위해 희생한다는 의미로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미얀마 실상을 알리고 국제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딴 툿 우 동국대 교수에게 미얀마 현지에서 보낸 온 사진이다.

미얀마가 군부 쿠데타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군부는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참패하자 근거없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다 지난 2월1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국민들은 곧바로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며 맞서고 있다. 시민저항이 끊이질 않자 미얀마군부는 시위대에 무차별 폭력과 발포로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헌법까지 바꿔가며 영구집권에 나선 군부에 맞서 국민들은 선거라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60년간 민주화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미얀마 국민들은 다시는 군부통치를 받을 수 없다면서 임시정부 구성에 들어가는 등 체계적 저항을 이어가며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북대 인문학술원은 복현콜로키움과 공동으로 23일 오후 인문학진흥원에서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위한 지원과 연대'를 위한 제9차 인문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포럼에는 딴 툿 우 동국대 글로벌경제통상학부 초빙교수가 '미얀마 민주화항쟁의 전개 양상과 향후 전망'이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딴 툿 우 교수는 이날 발표를 통해 미얀마 군부독재의 형성과 아웅산 수치 여사와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 전개 과정, 현재 진행 중인 군부 쿠데타와 시민 불복종 양상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성공을 위한 국제적 연대 필요성과 그 방법을 제시했다. 딴 툿 우 교수의 발표를 중심으로 미얀마 군부 통치 배경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향후 전망을 두 차례에 걸쳐 집중 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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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툿 우 동국대 초빙교수

미얀마 국민들은 1962년 쿠데타로 군사독재 체제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60년 동안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버마)는 1962년 네 윈의 쿠데타 이후 민주화 운동을 폈으나 번번히 좌절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국민들은 2015년 자유선거에서 아웅산 수치의 민족주의민주연맹(NLD)에 표를 몰아주며 정권 교체에 성공하고, 2020년 11월8일 총선거에서 다시 NDL이 압승(개원의석 83%)하도록 했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의 확고한 기반을 다진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다 지난 2월1일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미얀마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 넣고 있다. 이에 저항해 미얀마 국민들은 시민불복종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민주화 의지를 굳건히 하고 있다.

◆ 3기에 걸친 군부 장기집권

미얀마 군부 집권은 1962년 군부 쿠데타 이후 짧은 정권 이양 외에는 사실상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62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네윈 사회주의계획당(BSPP)은 1988년까지 무려 26년을 집권했다. 집권초기 네윈은 버마식사회주의계획당(BSPP: Burma Socialist Programme Party)을 조직하여 모든 국가권력을 손아귀에 쥐었다. 사유재산 폐지를 통해 모든 토지와 민간 기업 등 경제 전 분야에 대한 국유화를 진행했으며, 소위 버마식 사회주의 이념을 적용하여 수입대체전략 등 폐쇄적이고 내수 지향적인 경제정책을 중앙통제를 통해 실시했다. '자급자족 경제'를 지향하면서 '자급자족적 고립경제'에 빠졌다.

이로 인해 네윈 집권기간 미얀마는 최빈국(最貧國)으로 전락했다.


1962년후 3기걸친 장기집권
억압된 자유에 대한 몸부림
분노한 학생·청년 저항에도
군·경의 무차별 학살로 좌절

수치여사 민족민주동맹 결성
미얀마민주화 상징으로 부상
군부, 권력장악에 반항 거세자
다당제총선 약속후 결과 불복
영구집권위한 헌법까지 개정

국민들 수십년간 반정부시위
2020년 총선 NLD 큰폭 지지
군부 통치 불신임 표시에도
부정선거 주장하며 또 쿠데타



미얀마의 국채는 1955년에 6천200만달러에서 75년에 3억1천900억달러 84년 34억달러, 89년 43억달러로 급증했다. 지하경제의 규모 확대와 군부의 비효율적인 국정운영으로 대부분의 소비재는 암시장을 통해 거래됐으며, 87년 12월에 UN에 의해 최빈 국가로 지정되면서 국제통화기구로부터 외채· 외환 문제 해결을 위해 ODA( 공적원조기금 )를 신청하게 된다.

87년 9월5일에 통용지폐 회수 정책 실시로 무능한 군부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억압된 자유에 대한 항의가 시작됐다.

88년 3월12일에 BSPP 당원의 아들이 찻집에서 양곤기술대 학생을 다치게 하였으나 풀려난 것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지역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학생 한 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면서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확산됐다. 국민들은 일당 독재 체제를 규탄하고 다당제 민주주의체제를 요구했다.

당시 양곤에서 약 100만명과 제 2의 도시인 만달레이에 약 10만명 등 두 도시에서만 110만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대에 대한 군·경의 무차별적인 학살로 최소 3천여명의 무고한 시민이 사망했고, 군인들에 쫓긴 학생 및 청년 약 1만명이 인근 태국과 중국·인도 국경지역으로 피신했다.

그러다가 1988년 8월8일 오전 8시에 국민들이 소위 '8888항쟁'을 일으키자 그해 9월 소마웅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전원 군인으로 이루어진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를 창설한 다음 군사정부가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군사정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시할 수 없어 법질서 회복, 인권 개선과 다당제 총선 실시 등을 내세웠다.

◆불굴의 민주화 투쟁

병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영국에서 미얀마에 돌아와 있던 아웅산 수치 여사는 1988년 9월 NLD를 결성하고 총비서직을 맡으면서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이 됐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1989년 가택연금됐다. 그러나 국민저항으로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폐지와 다당제 민주주의를 채택한 후 치러진 1990년 5월27일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가 압승했다. 연방의회에서 NLD는 총 492석 가운데 392석을 차지해 대승했다.

그러나 군부는 약속과 달리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아웅산 수치 여사를 가택 연금 시킨 후 소마웅 장군이 1992년까지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ROC)의 의장과 총리의 역할을 하면서 2기 군부독재를 실시했다. 이어 딴쉐이 장군이 1992년 4월23일에 소마웅 장군을 제치고 기존의 SLORC의 의장이 되면서 군부독재 3기를 집권했다. 딴쉐이 최고사령관이 1997년에 기존의 SLROC를 폐지하고 국가평화발전위원회(SPDC)를 발족하여 의장이 된뒤 2011년까지 집권했다.

계속된 군부통치로 억압된 삶을 살던 미얀마에 국민들은 2006년이 되자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2006년에 쌀·계란·식용유 가격이 40%까지 인상되고 2007년 8월15일 군부가 예고도 없이 유류가격이 1.40달러에서 2.80 달러로 인상하자 이에 반발하면서 시위를 일으켰다. 소위 샤프란 혁명의 시작이다. 9월에는 빠코욱꾸에서 비폭력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명의 승려가 사망하자 민주화 세력은 군사정권에게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군부에서 거절하자 9월24일 양곤에서 10만명 이상의 승려와 일반시민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등 샤프란 혁명이 절정에 달했다. 공식통계는 사망자가 10명이라고 발표했으나 2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구속자는 무려 6천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승려가 1천400여명이었다.

시위를 무력 강경 진압한 군부는 2008년 5월 영구집권을 노린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외국인과 결혼했거나 군 출신이 아닌 사람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해 아웅산 수치 여사의 대통령 선거 출마자체를 봉쇄하고, 반면에 군인의 정치참여는 합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정헌법은 △군부의 국가의 정치적 리더십 역할 참여를 규정하고 △국가비상 사태 발생 시 대통령이 행정·입법과 사법권을 군 총사령관에게 이양 △군 총사령관이 국방장관·안보내무장관 등 3개 장관 후보 지명 △ 군통수권은 대통령이 아닌 군 총사령관이 보유 △연방의회에서 선거 없이 군부는 25 % 의석 확정 △개헌의 조건으로 연방의회 의원의 75% 의 사전 찬성과 국민투표에서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개정하도록 해 합법적인 군부장기집권의 길을 터 놓았다. 국제사회에서는 민주적으로 치른 국민투표가 아니라고 일제히 비판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헌법 개정후 군부는 2010년 11월7일 총선을 통해 집권을 한다.

당시 총선은 선거제도가 민주적이지 못하고 불공정하다는 판단에 따라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NDL과 샨민족민주주의연합(SNLD) 등 주요 정당이 정당 등록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군부는 2천100여명에 이르는 정치범들은 입후보를 하지 못하게 했다. 군부는 아웅산 수치 여사를 선거가 끝난 뒤 가택 연금에서 해제했다. 당시 선거는 군부와 관권이 개입한 비민주적 선거였다.

이 같은 군부의 계속된 탄압에도 민주화를 향한 미얀마 국민들의 투쟁의지는 점점 더 타올랐다. 2015년 11월8일 치러진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가 상하원 전체 657석 가운데 390석(59.4%)으로 과반수를 차지하여 압승했다. 그리고 6년 뒤인 2020년 11월8일 총선에서는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끈 NLD에 다시 압도적 지지를 보내면서 국민들은 군부통치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박종문기자 kpj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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