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9·끝> 성석제의 '예천, 꿈의 샘에서 봉황을 기다리다'

  • 입력 2021-05-25 16:04  |  수정 2021-05-31 13:49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성석제의 예천, 꿈의 샘에서 봉황을 기다리다



예천군의 예천(醴泉)은 ‘단술(醴)이 나는 샘’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인지 예천에는 샘이 많다. 또한 그 샘들은 꿈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천의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조선 중기에 다섯 번이나 판서를 지내고 좌·우의정을 역임한 명재상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다. 그는 어느날 예천의 고평리에 집을 짓고 우물을 팠다. 웬일인지 아무리 깊게 파도 물이 나기는커녕 뽀송뽀송하기만 했다. 고민을 하던 중 어느날 꿈에 용이 나타나 꿩 알만 한 돌을 주며 그 돌을 구덩이에 넣으면 물이 날 것이라고 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금당실에 볼일이 생겨 살았던 옛 집에 들렀다. 그때 그의 눈에 꿈에서 용이 주던 알처럼 생긴 돌이 눈에 띄었고 그 돌을 가지고 온 그는 마른 구덩이에 돌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구덩이에서 물이 펑펑 솟아나기 시작했다. 예천읍 고평2리에 있는 `중간샘'이라는 우물이 바로 이 우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샘에 관련된 꿈은 약포만 꾸었던 게 아니다. 예천읍의 청복리 마을에 박 씨와 김 씨, 두 씨족이 살았다. 어느날 두 씨족은 마을의 식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아 샘을 파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여러 곳에 샘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박 씨 노인의 꿈에 어떤 도인이 나타나 ‘이곳 마을 가운데의 논을 깊이 파면 물이 콸콸 쏟아질 것이다’라고 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샘을 파자 갑자기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물이 용솟음쳤다. 그리하여 그 샘을 용정(龍井)이라고 부르고 마을 이름도 용정이라고 하였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용정 인근에는 오랜 옛날 하늘의 옥황상제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도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두천(龍頭泉)’이라고 부르던 샘이 있기도 했다. 옥황상제가 다녀간 이후로 이 샘물을 마시면 피부병이 없어지고 옻이 오르지 않는다고 하여 ‘옻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질이 빼어난 온천이 나는 감천면, 샘을 찾는 선비와 동자의 전설이 있는 풍양면 청감리 등 예천에서 샘의 흔적을 찾는 것은 너무도 쉽다.
 

삼국시대에 예천을 지칭하던 명칭은 수주(水酒)였으니 물맛이 술처럼 향기롭고 좋다는 데서 나왔다. 수주와 예천의 글자 하나씩을 딴 이름인 ‘주천(酒泉)’이라는 샘이 예천읍 노하리에 있는데 이 샘은 물맛이 달 뿐 아니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철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고 한다. 바로 이 샘 때문에 통일신라 때 예천이라는 행정 지명이 생겼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엇갈리고 있으나, 참고 문헌이나 구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 샘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다.
 

깊이가 팔 미터나 되는 이 샘은 지하에서 용출하는 자연수로 지역민들에게 감로수(甘露水) 같은 역할을 했다. 주천이 있는 군방골은 조선 중기까지 관아와 함께 활을 만들던 궁방(弓房)이 모여 있었으며, 일설에는 동헌을 지키던 군방(軍房)이 있던 곳이라 하여 궁방골샘 또는 군방골샘이라 구전되고 있다. 예천의 명궁이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예천에 주천은 또 있다. 예천읍 서본리 선산봉으로 난 길 지고개에는 박샘이 있는데 옛날에는 이 곳에 술이 나는 샘이 있다 하여 주고개(酒峴)라 했고 샘은 주천이라 했다는 것이다.
 

옛날 추운 겨울에 어느 가난한 집 아낙네가 남편에게 줄 술을 사서 조그마한 항아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급히 고개를 올라가다가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나고 술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힘들게 구해온 술을 버리게 된 것이 슬프고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남편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어 아낙은 그만 대성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울고 또 울다 아래를 보니 조그만 구덩이에 아까 쏟은 술이 괴어 있는 것이었다. 아낙은 그 술이나마 바가지에 담아 집으로 가지고 가서 남편에게 주었다. 이튿날 같은 고개를 지나다 보니 또 그 자리에 술이 괴어 있는 것이었다. 이 술을 가져다 또 남편에게 주고 하기를 반복했다.
 

곧 이 소문이 인근 주민들에게 퍼졌다. 이 샘에서 나는 물은 한 그릇을 마시면 술이고, 두 잔을 마시면 취하고, 세 잔을 마시면 물이 된다고 하여 사람들은 경계를 하면서도 애용했다. 어느날 이 고개를 넘던 물정 모르던 나그네가 있었다. 그는 물을 한 그릇 퍼마셔보고는 술임을 알자 마시고 또 마셔서 얼큰히 취한 뒤에도 마구 퍼마셔댔다. 그때부터 샘의 술이 모두 물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또 있다. 상리면 도촌리에는 수수암이라는 거대한 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 맑은 옹달샘이 있다. 원래 이 옹달샘은 바위구멍이었다. 옛날 바위 옆에는 작은 암자가 있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암자에서 스님이 바위구멍에 대고 몇 사람이 왔다고 말하면 신기하게도 사람 숫자만큼 국수가 나와서 사람들이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암자의 스님이 자리를 비웠다. 젊은 행자승이 욕심을 부려서 바위구멍에 대고 사람이 한 사람임에도 두 사람이라고 하자 국수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난 행자승은 나무작대기로 그 구멍을 쑤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벼락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갈라지며 붉은 물길이 솟아오르고 행자승은 놀라 그 자리에서 혼절하여 죽고 말았다. 이후 암자는 없어지고 국수가 나오던 구멍은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이 되었다고 한다.
 

보문면 산성리 아랫마을에는 ‘원터’라는 돌로 쌓은 집터 모양의 돌담이 있었다. 옛날 이 곳은 안동, 의성 방면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 하여 길이 험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다녔다고 한다. 고을 원님이 이 곳을 지나는 행인들을 위해서 돌로 집을 짓고 이곳에 밥을 갖다 놓게 하여 오고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상하게도 밥을 먹고 가는 사람이 꼭 밥값에 해당하는 돈을 놓고 가곤 해서 그 돈으로 다시 그곳에 밥을 차려 놓을 수 있었다.
 

주천과 수수암의 비밀은 실상 이런 게 아닐까. 샘물이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듯 샘과 밥의 은혜와 덕으로 기갈과 굶주림을 면한 사람들이 돌아와서는 뒷사람들이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이 먹고 마신 만큼을 채워놓은 게 아닐까.
 

나그네에게 샘물을 나눠주는 것을 ‘급수공덕(汲水功德’이라고 한다. 예천에는 고개가 많고 그 고개를 넘는 사람들에게 샘은 예천의 무상(無償)의 선의를 맛볼 수 있는 약수였다. 그 공덕이 평화와 인의의 풍속을 예천에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수많은 샘에서 솟은 물이 계곡물을 이루고 시내가 된 뒤 합쳐져서 내성천이 되고 낙동강이 되어 누천년의 세월을 흘러갔다. 강은 회룡포의 절경을 빚고 삼강 주막과 사통팔달의 길 위로 무수한 나그네를 실어 날랐다.
 

중국의 <시경>에는 ‘봉황은 예천의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봉황은 신령스러운 새로서 수컷을 봉이라 하고, 암컷을 황이라 한다.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으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설명은 <산해경>에 있다.
 

내성천변 고고한 은행나무 소나무 왕버드나무여, 삼강의 회화나무여, 석송령이여, 금당실의 소나무들이여, 용궁의 팽나무 황목근이여, 보지 못하였는가. 예천에 부리를 적시러 날아온 봉황을.

성석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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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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