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다운사이징'이라는 화두

  •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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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수정 2021-08-11 07:33  |  발행일 2021-08-11 제면
인구절벽·에너지 구조 재편

큰 폭의 경제성장 어려운데

대통령 후보들 성장 타령만

시대의 환부 정직하게 통찰

'다운사이징' 필요성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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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예비후보들의 토론을 지켜보다가 1980년대 말쯤 네덜란드의 경제학자 출신 정치인 하웃즈바르트가 쓴 책에서 발견했던 '제로 성장'이라는 개념이 문득 기억에 되살아났다.

요컨대 그 개념은 경제성장을 물가상승률에 맞추는 대신 공정 분배와 에너지 효율화에 집중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당시 친구들은 한결같이 한국 사회에선 적합성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화석연료와 소비자본주의에 길들어진 서구 문명을 싸잡아 비판하던 로마클럽 이래의 유럽 지식 사회의 분위기가 솔직히 철모르는 부잣집 도련님들의 만용 섞인 유토피아주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사회는 당시의 유럽 사회와 비슷한 측면이 많아졌다. 산아제한을 할 수밖에 없던 피라미드형 인구구조가 인구절벽을 걱정해야 하는 다이아몬드형 인구구조로 바뀌었고, 산업화와 도시화의 큰 파도가 지나간 뒤로는 도무지 큰 폭의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일사불란한 노사관계는 기대할 수 없으며, 노사정이 아무리 협력해도 괜찮은 일자리 만들기는 어렵기만 하다. 국내 경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인종, 다문화의 흐름을 타야 하고, 국제인권을 비롯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공식적인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뒤에는, 탄소 배출 제한을 비롯한 에너지구조의 재편에 모범을 보여야 할 뿐 아니라, 약소국가에 대한 대외원조 부담을 줄일 수도 없다.

한데 TV 화면 속 대통령 예비후보들은 모두가 성장 타령이다. 정권을 비판하는 쪽에선 부패만 없애면, 독점만 없애면, 규제만 없애면, 예전처럼 다시 큰 폭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여권 후보들의 결론은 마찬가지다. 코로나만 지나가면, 수도권보다 지방에 투자하면, 기본소득으로 유효수요를 늘리면, 그래도 다른 나라들보다는 더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 예비후보들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다른 누구보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더 많이 더 빠르게 다시 성장할 수 있다"라는 말일 것이다.

하웃즈바르트가 네덜란드에서 정치하던 시절에도 지금 TV 화면의 대통령 예비후보들처럼 더 많은 성장, 더 빠른 성장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럽 문명이 쌓아 놓은 재앙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양심적이고도 용기 있게 '제로 성장'을 주장하는 정치인들 또한 있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정직성이야말로 유럽 문명을 여전히 세계를 선도하는 자리에 있게 만드는 근거일지도 모른다.

물론 수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경제구조에서 새로운 시장과 기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는 것은 일종의 숙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성장 신화를 붙들고, 신남방과 신북방 국가들에 열심히 투자하고, 코로나19 이후의 4차산업혁명에 총력을 기울이며, 탄소 중립과 그린뉴딜에 사활을 걸고 창의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한국 사회의 많은 부문에서 '제로 성장'은 아니더라도 일종의 '다운사이징'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인구구조의 격변이라는 한 가지 측면만 보더라도 공교육, 대학, 군, 공무원 조직, 공기업,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의 개혁은 피할 수 없으며, 인구 감소가 극적으로 진행 중인 농어촌 지역의 구조조정도 더 미루기 어렵다. 시대의 깊은 환부를 정직하게 통찰하는 대통령 예비후보라면, 성장 신화만을 앞세워 국민을 눈속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직하게 '다운사이징'이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의 명백한 화두라는 점을 국민 앞에 주장해야 한다.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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