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광장] 청와대 민정수석실, 폐지가 답

  • 신지호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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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8-13   |  발행일 2021-08-13 제23면   |  수정 2021-08-13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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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호 정치평론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힘은 여타 수석실의 힘을 다 합쳐놓은 것보다 세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인데, 사정 권력 때문이다. 민정수석실은 검찰과 경찰, 국정원, 감사원, 국세청 등 5대 권력기관을 총괄한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 및 고위공직자에 대한 감찰권도 민정수석실에 있다. 감찰반 6급 직원이 장관을 독대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정수석실은 국가 사정 권력의 정점이다. 원래 '민정(民情)'은 민초들의 사정과 생활 형편을 뜻한다. 4서3경 중 제왕학의 교과서라 불리는 '대학(大學)'에 보면 군주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찰민정변인재(察民情 辨人才)'가 나온다. 백성의 사정을 잘 살피고 인재를 잘 고르라는 것이다. 이처럼 민정의 본래 기능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가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이를 국정에 반영해 정책을 펼치도록 보좌하는 역할이다. 자칫 외딴섬이 될 수 있는 청와대, 즉 대통령과 국민을 잇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눈과 귀가 돼야 하는 곳이다.

민정수석실의 역사는 어떻게 되나. 대통령 비서실이 생긴 것은 1960년 8월13일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에는 민정수석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민정수석실은 박정희 정부 1968년 3월에 신설되었다. 초대 민정수석은 정치인 출신인 유승원이었다. 전두환 정부 들어서는 민정수석실과 사정수석실로 나뉘었는데, 초대 사정수석은 허문도·허화평과 함께 '3허(許)'로 불린 육사 출신 허삼수 전 보안사령부 인사처장(1980년 9월9일~1982년 12월20일)이 맡았다. 한편 민정수석은 이학봉, 김용갑 등 군인 출신이었는데, 김용갑 민정수석은 전두환을 설득하여 이른바 '땡전뉴스'를 없애기도 하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사정수석을 민정수석으로 통합하면서 공안검사 출신으로 국정원 1차장을 지낸 김영수 민주자유당 의원이 초대 민정수석으로 발탁됐다. 후임으로는 역시 검찰 출신의 문종수 수석이 바통을 이었다. 민정수석실의 역할과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지자 김대중 정부는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고 민정비서관과 법무비서관을 비서실장 직속에 배치했다. 그러나 정권 2년 차인 1999년 옷 로비 사건이 터지자 민정수석실은 다시 부활한다.

막대한 권한과 정보를 쥐고 있으면서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하고 직무 범위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없는 민정수석 업무의 문제점은 우병우 사건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데 박근혜 국정농단에 대한 반(反)작용으로 출범한 문재인 청와대에서도 사정 기능에 대한 잡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김태우 전 특별감찰반원의 민간인 사찰 폭로, 유재수 전 부산 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이나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기획·하명수사 의혹으로 민정수석실의 월권과 직권남용 여부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사람만 바뀌었지 시스템이 그대로인 상태에서는 동일한 불행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민정수석에 비(非)검찰 출신 인사를 기용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 사태는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핵심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사정 컨트롤 타워로 기능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민정수석의 사정 기능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가장 강력한 제도적 기반이다. 그것은 정치와 사법의 분리라는 권력분립 원칙을 훼손하고 정치도구로서의 사정, 즉 사법의 정치화를 초래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망가뜨린다. 이 같은 비정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민정'이라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괴물이 되어버린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폐(廢)하는 것이다.
신지호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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