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인문학술원과 함께하는 [다시 읽는 고전명작]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혁명의 환상 거부하고 평화 외친 사나이

  • 김규종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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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01   |  발행일 2021-10-01 제21면   |  수정 2022-02-22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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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작 영화 '닥터 지바고' 포스터 리터치. 〈영남일보DB〉
노벨문학상에 선정됐지만 조국추방 위기놓여 수상 포기한 비운의 작품
주인공 '유리 지바고' 통해 당대 지식인들 고뇌 담고 폐쇄적 사회 비판
20세기 초 러시아 격변기 속 등장인물 솔직담백한 내면토로 독자 위로



절대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지 3년 후인 1956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oris Pasternak)는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Доктор Живаго)를 탈고한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주창한 '스탈린 격하 운동'과 '해빙기'의 특수성을 고려한 시인은 소설출판을 낙관한다. 그러나 '닥터 지바고'는 사회주의 10월 혁명과 인민, 소련의 사회건설을 중상했다는 이유로 출판 금지처분을 받는다. 한국전쟁과 매카시즘으로 동서냉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가운데 '닥터 지바고'는 1957년 이탈리아에서 출간된다. 그 이듬해에 소설은 18개 언어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스웨덴 한림원은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작으로 '닥터 지바고'를 선정한다. 이로써 파스테르나크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하나는 노벨상 수상과 귀국 금지, 다른 하나는 수상 거부와 국내 잔류였다. 소련의 시인과 작가들을 총괄하는 '작가동맹'은 노벨상 수상과 무관하게 파스테르나크를 제명한다. 파스테르나크는 노벨상 수상 거부 의사를 밝히고 소련에 체류한다. 1960년 그는 파란만장한 70년 생애를 마감한다. 그리고 5년 뒤인 1965년 영국 출신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이 '닥터 지바고'를 연출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리 지바고와 라라 그리고 토냐의 삼각관계 공식은 할리우드의 오마 샤리프와 줄리 크리스티 그리고 제랄딘 채플린의 관계에서 발원한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인물상과 시대, 혁명과 역사는 영화에서 가혹하게 왜곡-변형-축소되어 파스테르나크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시인이 들여다보는 대목은 결혼한 남녀 유리와 라라의 금지된 사랑과 육체의 그리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닥터 지바고'에는 20세기가 막 시작한 1901년 볼가강에서 시작한 서사(敍事)가 1953년 스탈린 사후의 모스크바에 이르도록 유장하고 대규모로 진행된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과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 사회주의 10월 혁명, 거기서 촉발된 적백내전과 7년의 신경제정책 시기, 그리고 지바고가 최후를 맞이하는 1929년이 소설에서 빼곡하게 묘사된다. 에필로그에 이르러 독자는 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의 죽음에 이르는 20여 년 세월의 경과를 확인한다. 따라서 50년이 넘는 장구한 시간과 실명으로 등장하는 60여 인물들의 초상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풍요롭게 인도한다. 여기 더하여 작가는 우리에게 인간과 역사에 관한 다채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김나지움에서 고전과 성서, 전설과 시, 역사와 자연과학을 공부한 유리 지바고는 의대에 진학하여 일반 내과와 안과를 전공한다. 지바고에 고유한 속성 가운데 하나인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조화로운 결합이 소설을 풍성하게 한다. 그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엄정한 과학자이자 동시에 예수의 세계사적인 의미와 인간을 둘러싼 다채로운 시와 고전을 섭렵한 전인적인 지식인이자 교양인이다.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국민의회 의원 G가 일갈했던 것처럼 "프랑스 대혁명은 예수 탄생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는 의식을 가진 인간이 지바고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지바고는 10월 혁명과 소비에트 정권 수립에 환호한다. "얼마나 멋진 수술인가! 해묵은 고약한 종기를 단번에 도려내다니! 오래도록 떠받들었던 부정을 군말 없이 처형했군. 두려움 없이 이렇게 끝장을 낼 때는 우리 민족의 진면목(眞面目)을 볼 수 있어. 푸시킨의 솔직담백한 맛과 사실(事實)에 대한 톨스토이의 확고한 신념에서 내려오는 무엇인가가 있어."

그러나 혁명을 둘러싸고 피비린내 나는 적백내전이 발생하자 지바고의 태도는 급변한다. 목적이 정당하다 해도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다. 지바고는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며,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려면 선으로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폐쇄성과 사실 왜곡, 진리를 향한 무관심 때문에 10월 혁명에 등을 돌리고 아주 냉담해진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소박한 바람마저 외면하는 소련의 우울한 현실을 비판한다.

"나는 농부의 노동과 의료사업을 하면서 지내고 싶고, 무엇인가 후세에 남길 수 있는 근본적인 것을 구상하고, 과학논문이나 예술작품을 쓰고 싶다. 치료나 글쓰기를 방해하는 것들은 가난이나 방황, 불안이나 변화가 아니라, '미래의 새벽'이니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니 '인류의 등불'이니 따위의 구호가 만연한 우리 시대의 정신이다."

라라는 지바고와 똑같은 생각을 소유한 인물이다. "혁명 이후 러시아에 허위가 찾아왔다. 모든 악의 근원은 개인 의견의 가치를 불신하는 데 있다. 자신의 도덕성에 따라 행동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맞추어 살아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외부에서 강요된 관념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 대목은 1949년에 출간된 조지 오웰의 '1984'를 연상시킨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이라는 표어 아래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 그리고 경찰 헬기가 감시하는 전체주의 통제사회. 2%의 핵심당원이 13%의 일반당원과 85%의 프롤(레타리아) 위에 군림하는 악의 제국 오세아니아. 어쩌면 파스테르나크는 반유토피아 소설의 효시인 예브게니 자먀틴의 '우리'(1924)를 통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바고와 라라는 그런 암울한 전체주의와 획일주의 안에서 서로 숨 쉬고 위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열망하지 않았을까!

'닥터 지바고'에서 악질적인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가 악랄하게 편집해낸 스트렐리니코프는 라라가 코마로프스키를 따라 극동으로 떠나간 다음 지바고를 찾아와 밤새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이튿날 권총 자살한다. 자신보다 훨씬 윗길에 있던 구원의 여인 라라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실현하지 못한 비운의 인물. 6년에 걸친 이별과 가혹한 자제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절대 순수의 영혼을 가진 사내 스트렐리니코프. 파리로 이주해야 했던 토냐가 남긴 장문의 편지 역시 우리의 가슴을 절절하게 울린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당신이 그걸 알아주신다면! 나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당신의 남다른 점을 모두 사랑하고 있어요.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소중합니다. 나는 당신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요. 당신 좋을 대로 살아가세요. 당신만 좋다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운명적으로 엇갈리고 만나고 헤어지는 인간군상과 그들을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데려가는 혁명과 전쟁의 대격변을 그려냄으로써 파스테르나크는 20세기 최대의 역사적 사건을 오늘에 재현한다. 빛나던 시대의 청정한 별처럼 맑고 투명했던 인간들의 솔직담백한 내면토로가 혹은 격정적으로 혹은 유장하게 전개되는 위대한 서사시 '닥터 지바고'가 우리 곁에 있다.

김규종 교수(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공동기획:KNU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김규종
김규종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김규종 교수는
고려대 문학박사(러시아 희곡)로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경민교협 집행위원장, 경북대 전교교수회 부의장, 민교협 공동의장 겸 대경민교협 의장, 경북대 인문대학장, 복현 콜로키움 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민예총 대구지부 영화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대구 문화방송 '시인의 저녁' 주관자 겸 진행자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유라시아 횡단 인문학', '노자의 눈에 비친 공자' '기생충이 없었다면 섹스도 없었다?!' '대학생으로 살아남기' '문학교수, 영화 속으로 들어가다.(1~8권)' '극작가 체호프의 희곡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소련 초기 보드빌 연구' '파안재에서' '비가 오는데 개미는 왜 우산을 안 쓸까?!' 등이 있으며, 공저로 '역동적인 대한민국을 찾아서' '우리 시대의 레미제라블 읽기'가 있다. 인문학의 확대와 보급, 민주사회 건설과 부의 공평한 분배, 가족주의를 극복하고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 만들기, 나와 우주의 합일과 자유로운 공존을 위한 내적인 성찰과 실천 등이 주된 관심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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