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인문학술원과 함께하는 [다시 읽는 고전명작]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프랑스판 '로빈슨 크루소' 영국판 소설과 뭐가 다를까

  • 김성택 경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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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24   |  발행일 2021-12-24 제21면   |  수정 2022-02-22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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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란자는 이제 기름진 땅으로 가꾸어야 할 황무지가 아니다. 방드르디는 이제 내가 교육시켜야 할 야만인이 아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후반부에 주인공 로빈슨이 항해일지 속에 써놓은 이 문장은 작가인 미셸 투르니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이 소설의 결론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1719년에 발표된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미셸 투르니에가 20세기의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쓰기를 하여 1967년에 출간한 작품이다.

미지의 섬 표류·정착 줄거리 같지만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
원주민들 문화 이해하는 자세 달라

야생의 자연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정복의 대상 아닌 존중의 대상 강조
18세기 서구중심주의 제대로 꼬집어


영국 작가와 프랑스 작가, 18세기 초와 20세기 중반의 제작 연도, 소설 제목에 언급되는 인물로서 로빈슨과 방드르디 등과 같은 표면적인 차이가 금방 눈에 띈다. 내용을 비교하자면, '로빈슨 크루소'는 팽창주의적 식민주의를 표방하던 18세기 서구문명을 대표하는 소설이고,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이러한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야생의 자연과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입장을 표명하는 소설이다.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도 주인공 로빈슨은 항해 중에 풍랑을 맞아 미지의 섬으로 표류한다. '스페란자'라고 이름을 붙인 이 섬에서 로빈슨은 몇 번 시도한 탈출을 포기하고 경작지를 개척하여 농사를 짓고 야생 염소를 길들이며 살아간다. 난파된 배에서 꺼내온 문명의 잔해들을 사용하여 섬을 통치하는 군주처럼 지낸다. 타인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할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여 성경을 매일 읽는 것도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다를 바가 없다. 여기까지는 "총을 쳐들고, 염소 가죽을 걸친 채, 털모자를 덮어쓰고 삼천년 서구문명으로 가득 찬 머리를 쳐들고 서 있는 백인"으로서 로빈슨이 있을 뿐이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구출된 원주민의 이름이 '프라이데이'라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등장하는 혼혈 원주민의 이름은 '프라이데이'의 프랑스어인 '방드르디'로 정해진다. 금요일에 섬에 와서 구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라이데이든 방드르디든 그의 주인은 로빈슨이다. 즉 문명인과 원주민의 관계는 어쨌든 주인과 노예다. 미셸 투르니에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비판하기 위해 기본 설정은 거의 동일하게 시작한다. 야생의 섬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자이고 노예의 주인인 백인으로서 로빈슨은 '스스로의 모습을 본뜬 질서를 강요하는' 서구의 제국주의를 그대로 섬에 옮겨놓는다.

그러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줄거리에서나 소설적 장치에서나 상상력에서나 '로빈슨 크루소'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놓는다. 마치 소설 속에서 방드르디가 작은 나무들을 뿌리가 하늘을 향하게 '거꾸로' 심어 놓았지만 그 엉뚱한 생각이 의외로 좋은 결실을 가져왔듯이. 우선 사건이 진행되면서 로빈슨은 스페란자 섬과 방드르디를 지배하겠다는 생각에서 점차 벗어나 오히려 이 둘에게 매혹된다. 통치된 섬이 아닌 '또 다른 섬'으로서 스페란자를 마치 여인처럼 사랑하기에 이르고, 천박하고 미개한 노예가 아니라 '또 다른 방드르디'의 진가를 인정하고 찬미하기에 이른다.

제국주의적 통치자에서 우주적 원소들의 세례를 받은 '태양의 기사'로 변모하기까지 로빈슨은 커다란 파국을 겪는다. 가장 참담한 손실은 난파선에서 가져온 온갖 문명의 산물들과 식민지화된 섬에서 생산한 물산들을 축적해 두었던 동굴이 방드르디의 부주의에 의해 폭파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날려버린 로빈슨은 이제 방드르디의 방식을 좇아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이 원주민의 행동 속에서 '어떤 감춰진 통일성과 암암리의 원칙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셸 투르니에가 이 소설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상 프랑스의 유명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강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결과다. 1924년에 태어난 그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여러 차례 올라간 적이 있는 소설가이지만 원래는 철학교수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대학교수 자격시험에 실패한 후에 번역과 방송 및 출판 일에 몰두하다가, 그 사이에 파리의 인류박물관 강의에서 레비-스트로스를 알게 되었다. 그의 '신화적 사고'와 구조주의에 입각한 인류학에 영향을 받은 투르니에는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가진 문제점을 한눈에 파악하였고, 이 식민주의적 입장의 영국소설을 다시쓰기로 수정하고자 결심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과거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로빈슨과 중요한 인물로서 제 역할을 하는 방드르디가 등장하는 소설이 탄생하게 된다.

미셸 투르니에는 자신의 글쓰기에 '수공업적'이라는 표현을 때때로 덧붙인다. 이 표현은 레비-스트로스가 자신의 저서 '야생의 사고'에서 사용하는 '손재주꾼의 작업'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주변에 널려 있는 사물들을 모아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원주민의 손재주를 '수공업적'이라고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방드르디가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마치 놀이처럼 주변의 것들을 갖고 이것저것을 만들어내는 그 손재주! 그의 가장 걸작은 숫염소와 대결하여 이긴 후에 그 염소 가죽을 무두질하여 만들어낸 '노래하는 연'이다. 일상도구나 상징물에 새겨진 원시예술을 설명하기에 매우 적당한 이런 개념은 신화적 사고를 '일종의 지적인 손재주'라고 정의할 수 있게도 한다. 미셸 투르니에도 자신의 글쓰기를 신화적 사고의 산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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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택 경북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결론적으로 야생의 자연을 미개한 땅으로 간주하여 식민지화하던 서구문명의 표상이었던 로빈슨이 야생의 자연과 원주민을 만나 오히려 자신 속에 억압되어 있던 '자연'을 되찾아가는 이야기다. 이런 변모를 위해 작가는 서구문명의 합리주의와 기독교 정신 아래 억눌려 있던 신화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소설을 구성한다. 소설의 시작을 여는 타로 점은 마치 책의 목차처럼 로빈슨의 운명을 예견하고, 주인공의 변화를 물, 불, 대지, 공기와 같은 4 원소론에 따라 입문의식의 과정을 거치듯이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그 대표적인 방식이다. 문화와 인종의 차이를 차별로 대응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타자의 차이를 '관조적인 주의력'으로 경탄하는 일이다. 이런 매혹의 집중력은 개인의 자기완성이나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 수용을 이끄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김성택 교수 (경북대 불어불문학과)
공동기획 KNU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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