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인문학술원과 함께하는 다시읽는 고전명작] 사마천 '사기'…52만6500字에 담긴 인간·권력에 대한 생생한 증언

  • 윤재석 경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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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2-18   |  발행일 2022-02-18 제21면   |  수정 2022-02-1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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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을 모아 놓은 보물창고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흔적은 잡동사니일 뿐이다. 뛰어난 역사가는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사의 내면을 꿰뚫는 안목과 통찰력으로 잡동사니 속에서 유의미한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다시 이를 탐구함으로써 역사적 진실과 이성적 감동으로 채워진 사고(史庫)를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는 중국 문명사의 서막을 알리는 기념비적 저작이자 후대 역사학의 모범이며, 오늘날까지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더하고 있는 역사의 보고라 할 만하다.

사기의 원명은 '태사공서(太史公書)'로서, 지금의 명칭은 3세기 위진시대부터 붙여졌다. 태사공은 사마천이 아버지 사마담의 뒤를 이어 담당한 태사령(太史令)이라는 관명에서 비롯되었다.

태사령은 역사서 저술과는 무관한 천문·역법 및 제의를 관장하는 직책이다. 따라서 사기는 정사가 아니라 사마천 부자의 사찬 사서다. 그럼에도 이들이 사기 편찬에 목숨을 건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태사가 하늘의 이법(理法)을 궁구하는 천관(天官)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지상 세계는 하늘의 운행원리에 조응해 질서정연한 정치가 구현되어야 하고, 천체의 운행원리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달력이며, 달력에 명시된 시간의 선상에 놓인 인간사 고금의 변화를 관찰·기록하는 것이 태사이자 곧 천관으로서의 직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로서의 소명의식은 사마담 때부터 함양되었다. 사마담은 공자의 저작으로 알려진 '춘추'의 계승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사기의 저술을 사마천에게 유업으로 남겼다. 여기서 춘추는 단순히 노나라의 연대기로서만이 아니라 '춘추필법'의 정신으로 무장된 왕도의 정치적·도덕적 규범의 기준을 제시한 일종의 경전으로, 사마천 부자는 춘추를 계승하는 사기의 저술을 통해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꾼 것이다. 이러한 대의의 체계적 저록을 위해 사마천은 본기·세가·표·서·열전으로 구성된 기전체를 창안하고, 모두 52만6천500자의 사기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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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에게서 인간의 역사는 천체의 순환 운동 원리에 조응해 통일과 분열이 반복·순환하는 정치의 역사를 의미하고, 그 중심축은 제왕이었다. 이에 황제(黃帝) 이래 약 3천년간 존속한 나라와 그 제왕의 연대기를 '본기(本紀)'라는 편목으로 사기의 첫머리에 배치했다. 그러나 제왕만으로는 지상세계가 운영되지 못한다. 천체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28개의 별자리(二十八宿)와 함께 조화롭게 움직이듯이 지상 세계 또한 북극성격인 제왕의 조력자로서 28개의 제후(국)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28개 제후국의 연대기와 더불어 제후에 비견되는 위업을 쌓은 공자와 진섭의 세가를 추가해 모두 30편의 '세가(世家)'를 본기 뒤에 배치했다. 그리고 세가에 기술된 제후국 내부 또는 제후국 간에 전개된 사건의 선후와 상호관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십이제후년표 등 10편의 '표(表)'를 배치했다. 이들 편목이 상층부의 정치구조와 그 흥망성쇠를 기록한 것이라면, 이것의 운영 원리와 실제 작동의 기제는 8편의 '서(書)'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문물제도의 변화양상과 하늘의 이법에 조응한 지상질서의 운영원리를 동시에 기록했다.

이상이 광의의 정치적 현상에 대한 탐구의 결과라면, '열전(列傳)'은 정치 중심의 역사를 추동하는 실제 동력이 인간으로부터 나온다는 사마천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가장 잘 반영한 편목이다. 총 130편의 사기에서 70편이나 차지하는 열전에는 수천 명의 인물이 등장해 역사의 현장을 증언한다. 여기에는 유명 정치인이나 사상가는 물론이고, 심지어 협객·익살꾼·점쟁이, 나아가 주변 민족의 역사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는 부귀를 성취한 개인보다는 각 분야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데 기여한 개인의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추적한 결과로, 사기가 죽은 기록의 집대성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현장을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접목시킨 인간중심의 역사서임을 웅변한다.

'사기'처럼 2천여 년의 간극을 넘어 오늘날의 독자에까지 흥미와 교훈을 주는 사서도 없을 성싶다. 그 요인으로 사기가 가지는 역사관과 체제 및 서술방식의 우수성, 문학작품으로까지 칭송받는 문장력, 준엄한 비판정신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마천 개인의 통절한 삶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사마천은 무제를 위로하기 위해 흉노에게 항복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최고 존엄의 역린을 건드려 사형 판결을 받고, 이를 대신해 궁형을 자청, 환관이 된 후 기원전 91년 사기를 완성한다. 이는 스무 살 사마천이 아버지의 사기 저술을 돕기 위해 전국을 답사하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이래 죽음도 불사한 35년 대여정의 종결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목도한 냉혹한 현실과 이에 대응한 초인적 인내와 불굴의 의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황제의 심기를 거슬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형 판결을 내리는 폭력적 권력 앞에서의 좌절감, 50만전의 속죄금을 마련하지 못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하는 무력감, 궁형을 감내해야 하는 극단적 치욕감, 누구 하나 자신을 변호해주거나 경제적 도움을 주지 않는 부박한 세태에 대한 열패감, 더욱이 환관이 된 후 자신을 죽이려 한 황제로부터 오히려 총애를 받으며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굴욕감.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서도 그는 일시적 고통을 피하려고 가벼이 선택하는 죽음의 무가치를 일갈하면서 사기의 저술이 죽음보다 무거운 임무이자 입신양명의 길임을 설파하며 저술을 이어나간 것이다.

여기서 입신양명은 자신과 조상의 명성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정의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바꾸는데 기여한 개인과 집단의 명성과 그 존재가치를 드러내 후세에 전하는 일이야말로 하늘의 소명을 완수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사기를 사마천이 개인적 울분을 토로하는 '비방의 서'로 평가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사기는 저자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종횡하는 하늘의 섭리에 비춰 위대함과 어리석음이 착종하는 인간세상을 냉철하게 관조하며 역사적 진실을 대면한 미증유의 대서사인 것이다.

현대 역사학의 관점에서 사기는 비과학적이거나 고졸한 측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직업적 역사가들이 양산하는 무미건조한 역사 논저의 산더미 속에서 사기에 비견되는 고전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현대 역사학의 위기가 그저 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하여 대중매체를 떠도는 '역사소매상'들의 세치 혀끝에서 돈벌이로 전락하는 사이비 역사서의 양산은 더욱 경계할 일이다.

윤재석 교수 <경북대 사학과>
공동기획 KNU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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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석 교수는
1997년부터 현재까지 경북대 사학과에서 중국고대사의 연구와 강의에 종사하고 있다. 세부 전공은 중국고대의 사회사·법제사 및 목간학으로서, 주로 진한시대 목간자료의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북대 인문학술원장 겸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한국플러스(HK+)지원사업(2019년 5월~2026년 4월)의 연구책임자로 활동하면서 고대 한중일 삼국의 목간기록문화권의 형성과 전개 양상 및 여기에 반영된 고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복원으로 연구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경북대에서 학사·석사·박사과정을 졸업하였고,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고급진수과정을 수료하였으며, 중국고중세사학회장과 경북대 한중교류연구원장 및 경북대 교수회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사회과학원 간백연구센터의 객원연구원과 하북사범대학 역사문화학원의 객원교수 겸 학술고문, 중국사회과학원과 무한대학 및 감숙성문물고고연구소에서 발행하는 '簡帛' '簡帛硏究' '簡牘學硏究'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韓國·中國·日本 출토 論語木簡의 비교 연구' '秦漢時期後子制和家系繼承' '東アヅア木簡記錄文化圈の硏究' 등이 있고, 저서로는 '중국가족제도사'(역서), '睡虎地秦墓竹簡譯註' '簡帛學理論與實踐'(공저), '한국목간총람'(편저), '중국목간총람'(편저), '일본목간총람'(편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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