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인문학술원과 함께하는 '다시 읽는 고전명작'] 일연 '삼국유사'…건국신화·민중이야기 수록…고려의 자존감 지켜준 역사서

  • 이영호 교수 경북대 사학과
  • |
  • 입력 2022-03-18   |  발행일 2022-03-18 제21면   |  수정 2022-03-18 07:14

2022031601000539600022651
단군신화를 수록한 '삼국유사' 〈서울대도서관 소장〉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경북 경산 출신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것이다. 일연은 희종 2년(1206)에 태어나 충렬왕 15년(1289)에 84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인데, 뒤에 이름을 일연으로 고쳤다.

그는 고종 14년(1227), 승과에 상상과로 합격하여 오늘날 비슬산으로 불리는 포산(苞山)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약 35년간을 포산의 절에 있었으니, 보당암, 무주암, 묘문암, 인홍사, 용천사 등이 그곳이다. 그는 78세 때인 충렬왕 9년(1283), 승려로서 최고의 명예직인 국존(國尊)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노모 봉양을 이유로 귀향하였다가, 모친이 사망하자 군위 인각사에 머물다 일생을 마쳤다.

일연은 승려로서 많은 불교 관련 저술을 남겼지만, 오늘날 전하는 최고의 걸작은 단연 '삼국유사(三國遺事)'다. '삼국유사'는 신라·고구려·백제의 여러 일화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유사(遺事)라고 한 것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빠진 사실들을 적었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이 책은 5권 9편으로 되어 있다. 맨 앞에 왕력(王曆) 편이 있는데, 이는 신라·고구려·백제·가락국 등 역대 여러 왕들의 계보와 연대를 기록한 것이다. 권1·2는 기이(紀異) 편으로, 고조선 이후의 여러 나라와 신라·고구려·백제의 삼국에 관한 사실을 적었다.

고려 말 승려 출신 일연이 편찬
편찬 시기·목적 명확하지 않지만
몽골침략으로 피폐한 상황 감안
백성들에 긍정적 영향 끼쳤을 듯

손님 접대위해 아내와 동침 권유
비정한 남편 안길의 민담 등 수록
장애인·빈민의 생활상도 전해져
우리 문화 원형 이해하는 길잡이


권3은 흥법(興法)과 탑상(塔像) 두 편으로 되어 있다. 흥법 편은 불교 수용과정의 이야기이고, 탑상 편은 탑과 불상에 얽힌 이야기를 수록한 불교미술사이다. 권4는 의해(義解) 편으로, 원효, 의상 등 고승들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권5는 네 편으로 되어 있는데, 신주(神呪) 편은 밀교 수용사이고, 감통(感通) 편은 신앙상의 기적을, 피은(避隱) 편은 세상을 피해 은둔해 사는 사람들을, 그리고 효선(孝善) 편은 효도와 선행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왕력과 권1·2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라면, 권3·4·5는 불교와 승려와 민중에 관한 기술이라고 하겠다.

'삼국유사'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다. 왕력 편이 원래 '삼국유사'에 포함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고, 왕력 편과 기이 편과 흥법 이하 부분이 원래 각각의 책이었다는 주장이 있는 한편, '삼국유사'란 이름도 자연 뒤에 붙여졌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또한 내용 가운데는 일연이 집필하지 않고 제자 무극(無極)이 적어 끼워 넣은 부분이 2곳이나 있다.

'삼국유사'가 편찬된 시기 또한 정확히 알 수 없다. 인각사 보각국사 일연의 비문에는 당시 '어록(語錄)' '게송잡저(偈頌雜著)' 등 10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삼국유사'를 언급하지 않았다. '삼국유사' 편찬이 승려 일연의 본연의 의무가 아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충렬왕 대인 1281년 무렵 일연이 청도 운문사에 머물 때 집필한 것으로 흔히 추정하지만, 그의 말년인 인각사 시절이었다는 주장이 있고, 젊은 시절 포산에 있을 때부터 착수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에서는 그의 생전에 '삼국유사'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편찬자도 일연에 한정하지 않고, 제자 무극이나 기타 인물들까지 넣어 이해한다. 최근에는 1360년 무렵 완성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자세한 것은 더욱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포산 시절부터 축적된 일연의 노력과 경험이 '삼국유사' 편찬의 자료가 되었을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승려였던 일연이 '삼국유사'를 남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연이 살던 시대는 몽골의 침략기였다. 1231년부터 6차에 걸쳐 전개된 몽골의 침략은 고려의 전국토를 유린하였다. 이에 따라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참상이 그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삼국유사' 첫머리 고조선 조목에서 우리 민족의 건국 이야기인 단군신화를 처음으로 수록하였다. 우리의 역사가 중국이 아니라 하늘과 연결됨을 주장함으로써 민족의 기원을 보다 자주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려 한 것이다.

또 불교적 입장에서 유교의 합리주의 사관을 비판하고 신이(神異)한 사실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괴이한 것과 신이한 것을 구별하면서 기이 편 서문에서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나왔다고 하여 무엇이 괴이하겠는가?"라고 설파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사관을 달리한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에는 삼국만이 아니라 단군신화를 비롯한 삼한, 낙랑, 대방, 부여, 가야 등의 역사가 실려 있고, 황룡사 장육상, 만파식적 설화, 불국사와 석불사, 동화사의 창건, 포산의 두 성인 관기와 도성, 그리고 세달사의 승려 조신의 꿈 이야기 등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과 설화, 민담, 전설, 향가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세 아내를 데리고 살면서 손님 접대를 위해 동침할 것을 권한 무진주 안길(安吉)의 이야기, 아비 없이 태어나 열두 살이 되어도 말하지도 일어나지도 못한 사복(蛇福)의 일화, 태어난 지 다섯 살 만에 눈이 먼 여인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시 눈을 뜨게 된 이야기, 남의 집에 품을 팔아 노모를 봉양하였으나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어린 아이를 땅에 묻으려 한 손순(遜順)의 이야기 등 상대적 약자였던 여성, 장애인, 빈민, 서민 등 민중들의 생활상을 여과 없이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이야기는 우리 문화의 원형을 이해하는 길잡이일 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의 풍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요컨대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이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동시에 전통문화사이다. '삼국사기'가 유교적, 정치적 관점에서 지배층 위주로 서술된 연대기라고 한다면, '삼국유사'는 불교적, 민중적 관점에서 기록된 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는 이야기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이 상상력의 원천으로 '그리스·로마 신화'를 즐겨 읽듯이, '삼국유사'는 우리가 늘 가까이 두고 읽어야 할 민족의 고전 중의 고전인 것이다.

이영호 교수 (경북대 사학과)
공동기획 : KNU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2022031601000539600022652

이영호 교수는

한국고대사를 전공하며, 경북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관심사는 신라사로서 정치사, 불교사, 왕경사, 그리고 금석문과 목간 등의 문자자료에 성과가 많다.

학회 활동으로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대구사학회 회장, 한국목간학회 감사 등을 지냈다. 대외활동으로는 동북아역사재단 자문위원, 문화재청 고도보존육성 중앙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원장, 대구시 문화재위원회 위원, 경북도 문화재위원회 위원, 신라사학회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2014,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문자와 고대한국 2'(2019, 공저), '시대를 앞서간 고승 원효'(2020, 공저) 등 여러 권이 있으며, 논문으로 '신라 성전사원(成典寺院)의 성립' '팔공산 '부인사(夫人寺)'의 탄생' '신라 문무왕릉비의 재검토' '문자자료로 본 신라왕경(新羅王京)' '신라 사리함기와 황룡사' '영남과 호남, 그 연원을 찾아서' 등이 있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경북도에서 기획하여 완간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전30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관련기사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