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푸르다'는 말

  • 김살로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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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수정 2022-04-13 07:12  |  발행일 2022-04-13 제면
초록과 파랑은 한울타리 색

조상들 색깔 자체 구분보다

정서적 감흥을 색으로 표현

마음의 울림 빗대기를 즐겨

푸른 봄날을 맘껏 만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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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살로메 (소설가)

'푸른 신호등'이라는 말.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이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표현 중의 하나이다. 초록 신호등을 두고 왜 푸른 신호등으로 부르냐며 의아해한단다. 그린과 블루를 완전히 다른 색으로 인식하는 그들로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말에서 '푸르다' 또는 '파랗다'라는 의미는 녹색과 청색 모두를 포함한다. 푸른 초원, 파릇한 잔디, 푸른 바다, 파란 하늘 등의 관용구가 그 좋은 예이다. 예의 외국인과 달리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푸른색이 초록색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푸른 초원, 파릇한 잔디 등의 이미지가 푸른 바다, 파란 하늘의 그것보다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서정주 시인의 가을 시 '푸르른 날'도 봄 풍광을 노래하는 걸로 착각했을 정도였다. 첫 행에 나오는 '푸르른 날'이란 어구에서 파릇파릇한 잔디가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서양인들에게 그린과 블루는 심리적으로 아주 먼 거리의 색이다. 그린은 싱싱함을 상징하지만 블루는 우울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초록과 파랑은 한 울타리이다. 푸르다,라는 정서 안에서 대동단결한다. 청개구리, 청포도, 청테이프, 청신호 등은 누가 봐도 녹색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청자, 청바지, 청와대, 청군 등의 청색과 같은 범주로 이해한다. 미술학적으로 말하면 초록(草綠)은 동색이어도 초청(草靑)은 동색일 수가 없다. 한데 우리가 느끼는 정서는 그 둘을 같은 색으로 인식한다. 푸르다,라는 말을 포털 사이트 이미지로 검색해보았다. 초록의 나무와 푸른 하늘이 같이 있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푸르다,라는 의미는 초록색과 파란색 둘 다를 가리키는 것임을 방증한다.

푸르스름하다, 파릇파릇하다, 푸르딩딩하다, 푸르죽죽하다 등의 색감을 표현하는 말에 우리 조상들은 능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명확한 색깔로 구분하는 것에는 관심이 덜했다. 왜 그랬을까. 내 식으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정서적 감흥을 묘사하는 게 중요했지, 색깔 자체를 구분하고 이름을 부여하는 데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풀빛이나 산빛 또는 바다 빛이나 하늘빛에다 마음의 울림을 빗대기를 즐겼다. 그 물상들을 색깔이란 현상에 가두어 경계를 두려는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는 말이다. 삶의 심적 여로를 자연 빛에 기대 제 안에 스며들게 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흔한 초록과 파랑이 한 울타리 안의 정서로 묶이는 건 당연했다.

서구인들이 물리적 색을 먼저 정하고 정서를 대입했다면, 조상들은 정서적 풍경을 마음에 담고 그것을 색감으로 표현해나갔다. 조상들에게 색깔은 심상 깊은 곳의 반응 체계이지 물리적 현상이 아니었다. 색으로서의 객관성보다는 심적 주관성을 소중히 여겼다. 분위기와 애상에 방점을 두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녹색이니 청색이니 구별을 두려는 건 큰 의미가 없다. 푸른 신호등도 좋고 파란 하늘도 괜찮다. 초록이니 파랑이니 하는 구분은 미술적 필요에 의해 생겨난 색깔 이름일 뿐이다. 바탕을 이루는 감흥이 솟고, 마음에 흐르는 결이 같다면 둘은 같은 푸름으로 연결된다. 뭐든 확실히 구별 지으려는 사람에게나 푸르다,라는 의미가 어려운 숙제이지, 보통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풍요로움으로 다가온다.

온통 봄빛이다. 천지가 푸르다. 황사 없는 하늘빛도 푸르고, 꽃나무를 깔아주는 잔디도 푸르다. 파랑·초록 구분 없이 어울렁더울렁 저토록 푸른 날을 설움 없이 만끽할 일이다. 그것이 더없이 짧은 봄을 예우하는 가장 진솔한 방식일 터이니.

김살로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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