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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쓴다'의 용은 '용솟음친다'에서 나온 말이다. 위로 솟는 힘. 생물학 시간에 배운 부력이다. 물고기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부력이 있다. 용을 쓰면 몸이 가벼워진다. 올바른 걷기의 기본자세이며, 마임연기자나 무용수의 기본자세이기도 하다. 그렇게 얼씨구 춤사위를 조성진이 보여준다. 〈영상작가 주형돈씨 제공〉 |
◆이소룡이 가르쳐준 몸짓
유년 시절은 물론이고 이십 대 초반까지 몸이 약해 병치레하며 골골거렸다. 이후 어느 날부터 지병인 위장병도 사라지고 몸에 활기가 생겼다. 그 변화의 시작은 마임을 배우면서부터라고 생각한다. 마임은 연극과는 달리 말보다는 몸의 움직임이 중심이다. 그렇다고 운동선수처럼 대단한 근력이나 신체조건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몸보다는 마음을 써야 하는 움직임이다. 대학 신입생 때다. 마임을 배웠다고 하지만 보름간의 예술체험 같은 것이었다. 더 알고 싶었지만 교본도 출판된 관련도서도 없었다. 현대무용이나 무술 등 움직임에 대한 책을 뒤졌다. 헌책방에서 이소룡이 저술한 '절권도'라는 책을 발견했다. '실존주의적 권법'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 그 부제가 마음에 들었다. 몸을 쓰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마치 마법을 전수받는 느낌이었다! 백운도사에게 구름 타는 비법을 사사 받는 홍길동의 심정으로. 뒷동산에 올라가 나무를 발로 차며 이소룡의 몸속에 들어가 보려 노력했다. 그가 말하는 중심 개념은 '압력'이다. 몸 안의 에너지가 모여 가슴에 압력이 생기는데 수도꼭지를 열고 닫는 것처럼 그 압력의 분출을 조절하며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나중에 번역 소개된 마임교본에서 그 '압력'(pressure)이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그리고 40대가 돼서야, 그것이 우리말로는 '기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어서 그 기운의 활용을 의미하는 애쓴다, 용쓴다, 기를 쓴다와 같은 말들을 찾아냈다. 내 강의의 뼈대를 이루는 말들이다.
선조의 경험이 쌓이고 쌓인 한국인 몸짓의 원리가 그 말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제 우리의 몸은 단지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이웃과 소통하고 나의 매력을 발산하는 미디어다. 말과 글을 배우듯 자유롭고 멋진 몸짓도 배워야 한다. 대구YMCA 레크리에이션 강습에서 시작해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과 MBC 신입사원, 초등학교 교사들 그리고 '몸짓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자유시민대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그 원리를 배웠다. 이소룡의 절권도에서 시작된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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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애쓰고 살았다.
'애쓴다'는 말은 '애'가 창자의 옛말인 것에 착안하여 '창자에 기운을 모아서 쓴다'고 풀었다. 도가에서 말하는 하단전이다. '고생한다' 또는 '수고한다'와 같은 뜻으로 쓴다. 몸을 기계처럼 쓸 때 동원되는 기운이다. 근력을 사용하는 노동의 원천이다. 요즘에 와선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담기도 한다. 요령 없이 곧이곧대로 한다는 거다. 융통성도 없이. 사실 우리는 한동안 너무 애쓰고 살았다. 산업역군으로, 민족중흥을 위하여,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 해서, 가족을 책임져야 하니까, 살아야 하니까. 애쓴다는 말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도 같은. 자식이 아프면 애가 쓰인다. 애처롭다, 애가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 모두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애는 물리적인 힘만이 아니라 동시에 심리적인 측면의 정을 포함하는 말이다. 한국인에게 이 둘은 하나다. 애쓰는 것은 힘을 쓰는 것인 동시에 정을 베푸는 것이다. 춤을 추는 것은 흥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바람을 넣으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춤을 추는 길거리 홍보물 인형을 보면 애처롭다. 기운은 그렇게 물리적인 세계와 심리적인 세계를 나누는 서구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넘어서는 말이다.
오늘날은 개인주의 시대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제는 좀 약게 살고 싶어'라고 말한다. '보복 개인주의'일까? '열심히 살지 말자'고 착한 선동을 하기도 한다. 열정 페이에 대한 반감일까?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애쓰고 사는 삶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한다. 애를 쓰지 않고도 돈을 벌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애를 쓰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결국 허망하다는 것을. 애를 쓰지 않고는 사랑을 얻을 수도 없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 수도 없다.
살풀이와 승무의 대가였던 이매방 선생은 '요즘은 배꼽 아래에서 춤추는 것들이 없어'라고 말했다. 화려한 기교에만 마음을 쓴다는 말이다. 몸이 뜬다는 말이다. 우리는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깊이 있고 품위 있는 몸짓에는 중력의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너무나 애쓰고 살았던 것도 맞고 그래서 그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도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깊이와 당당함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새기자.
◆위기대응 능력
너무 애를 쓰고 산 것만큼이나 너무도 기를 쓰고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쟁사회니까 없는 힘 있는 힘을 다 써야만 했다. '기를 쓴다'는 것은 상단전에 기운을 모아 무엇인가를 한다는 말이다. 쉬운 말로 하자. 살다 보면, 정수리나 미간 혹은 목덜미을 긴장시킬 때가 있다. 그게 각각 역할이 다르다. 언제 정수리를 긴장시키며 기를 쓸까?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거나 두려움이 몰려오는 위급한 상황이다. 그때는 온몸의 기운을 남김없이 써야 한다. 이 때에 기를 쓰고 문제해결에 나서는 사람이 위기대응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지도자'라고 부른다. 남다른 집중력과 열정으로 주변의 다른 사람까지도 문제해결에 참여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긴장이 지속되는 사회는 피로감을 불러온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끌어다 쓴다. 영끌이고 오버하는 삶이다. 분단 이후 끝도 없이 전쟁에 대한 공포를 재생산하게 되면서 정상적이고 원활한 사회 활동이 어려웠다. 그만큼 기를 쓰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위기 상황에 정수리를 긴장시키는 것은 마치 초식동물이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에 귀를 쫑긋 세우는 것과도 같다. 집중력이 필요할 때 우리는 미간을 찡그린다. 눈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교한 몸짓, 즉 예민한 운동신경이 필요할 때는 목덜미을 긴장시킨다. 센스 있게 운동 근육을 조정하고 제어하는 소뇌를 깨우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해부학 또는 운동학적인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는 이렇게 흔치 않은 상황에 대응하는 몸짓을 기를 쓴다는 한마디로 인식하고 소통한 것이다. 몸에 대한 이런 통합적인 언어는 개인이 지각한 위기 상황을 이웃과 쉽고 빠르게 공유하고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용해야 사는 시대
'용을 쓴다'는 말은 의지를 갖고 움직인다는 뜻이다. 단전으로 말하면 명치를 중심으로 가슴에 기운을 모아서 쓴다는 말이다. 의지가 없는 움직임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 일상의 몸짓은 대부분 학습을 통해 습관으로 저장되어 따로 의지를 갖지 않아도 되는 효율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니 용을 쓴다는 것은 낯선 과제에 대응하는 몸짓, 즉 마음을 먹고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이다. 도전이고 용기를 내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프러포즈를 하고, 자신만의 의견을 말하고,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간다. 그것이 용을 쓰는 것이다.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자신이 밉다면 이렇게 해보자. 생각하면서 숨을 들이마시고 가슴을 내밀며 뒤로 가볍게 젖힌다. 곧 실천할 수 있는 의지 즉 '용'이 생긴다.
'용쓴다'의 용은 '용솟음친다'에서 나온 말이다. 위로 솟는 힘. 생물학 시간에 배운 부력이다. 물고기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부력이 있다. 용을 쓰면 몸이 가벼워진다. 올바른 걷기의 기본자세이며, 마임연기자나 무용수의 기본자세이기도 하다. 우리말 춤은 '추켜올림'에서 나온 말이다. 춤을 추려면 용을 써서 팔다리가 가벼워져야 한다. 균형을 잡고 서기 위해서는 위로 솟는 힘과 가슴에서 나오는 시선이 결합해야 한다. 특히 가슴에서 나오는 시선은 그 사람의 의지를 보여 준다. 인간관계에서 챙겨봐야 하는 부분이다. '노룩'(No Look)은 최악의 몸짓이다.
할만하다 생각한 사람이 하면 '장하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하면 '용하다'고 한다. 무당이 무언가를 잘 맞추면 '용하다'고 한다. 칭찬 같지만 사실은 멸시하는 말이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배운 것도 없고 사회적 권위도 부여받지 못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다. BTS는 클래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병역특례가 주어지지 않는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다. 애를 쓰는 것은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기를 쓰는 것은 그 힘을 컨트롤하는 것이다. 컨트롤은 역할이지 상위의 개념이 아니다. 머리가 몸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 곧 지배가 아닌 것과 같다. 가슴은 힘과 컨트롤이 만나는 곳이다.
용을 쓰는 것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몸이 주도권을 얻으며 무엇인가를 성취하면 그것이 용한 것이다. 정치가 바뀌면 일상이 바뀐다. 그것은 최근 변화하는 정치의 장한 측면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 역시 정치에 관심을 갖고 무언가를 요구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용하게 사는 문화가 생긴 것이다. 애쓰고, 기를 쓰고, 마침내 용을 쓴다. 국민이 생산하고 정치가 조절하고 모두가 누린다.
◆멀쩡하게 살자.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하다. '온전하다'의 사전적 낱말 풀이다. 완전하다가 목적이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온전하다는 타고난 본모습(性)을 잘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툭툭 털고 일어나 자신의 몸을 돌아보면서 말한다. 온전하네! 경상도에선 멀쩡하다고 한다. 너무 애만 쓰고 살면 한이 쌓인다. 기만 쓰고 살면 언제 돌연사할지 모른다. 용을 쓰는 것 역시 매우 훌륭한 몸짓이지만 종일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이 세 가지 기운을 최소한으로 고르게 갖추고 있는 것이 평상심이다. 마임에서는 그것을 '중립'(Zero Point)이라 한다. 어떤 움직임이라도 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지만,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지 않는, 긴장도 이완도 아닌 상태다. 속으로 나지막이 '온'이라고 속삭여 보자. 평정심을 얻게 될 것이다. 조금 크게 말해 보자. 당당함을 얻을 것이다. 마임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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