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순섭의 역사공작소] 금관 이야기〈8〉

  • 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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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30  |  수정 2022-11-30 08:30  |  발행일 2022-11-30 제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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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장

이 주제를 마감하며 전하고픈 핵심은 고대국가가 제도화한 복식이라는 틀 속에서 금관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나라마다 신분제나 관등제에 따라 위계화된 복식이 있었고, 그 복식 중에서 머리에 쓴 게 관이다. 더불어 황금 장식을 사용한 관은 형태에 상관없이 모두 금관이다. 당연히 신라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고대국가에서는 금관을 사용했다. 가장 보편적인 관은 상투를 덮는 작은 고깔인 모관(帽冠)이다. 익숙한 머리띠를 기반으로 하는 대관(帶冠)은 오히려 한정적인데, 재래신앙의 전통이 굳건했던 신라를 중심으로 주변 권역에서만 유행했다. 금관은 처음 왕족의 표상이었으나, 권력이 국왕 중심으로 바뀐 이후에는 왕과 왕비만 착용한 듯하다.

일반인에게 금관을 설명할 때 즐겨 드는 예는 군복이다. 군복은 유니폼으로서 착용자가 소속된 군대를 나타내는 일종의 문장(紋章)과 같다. 그리고 군복은 정복이냐 근무복이냐에 따라 복장 구성이 바뀌고, 계급과 임무에 따라 계급장과 휘장에 차이를 둔다. 그러므로 소속을 드러내는 문장처럼 관에 새겨넣은 도안은 나라마다 상징하는 바를 담아 고유하였다. 쓰임새에 따라 복식의 구성을 다르게 하였기에 모관과 대관을 구분하여 착용하거나 배제한 듯하다. 착용자의 권위가 곧바로 드러나게 재료의 재질과 비단의 색상을 차등하여 위계에 맞게 관을 꾸몄다.

이렇듯 관은 단순한 패션이 아니라 매우 엄격한 제도로서 관리된 관복 구성품이었다. 개인의 취향이 들어갈 여지도 적고, 먼 나라에서 불쑥 전해지지도 않았다. 물론 귀금속 재질을 기준으로 위계화한 관복제도는 고대국가가 통치체제를 고도화하며 이웃 나라들 사이에서 참고하거나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하나의 왕조가 족히 개국하고 멸망할 수도 있는 400~500년의 까마득한 시차와 흑해 연안이나 중앙아시아라는 아득한 거리 차이를 무시하는 속설이 넘쳐난다. 신라 금관의 기원이 마치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텔페 금관에서 나온 듯 이야기하는 게 대표적이다, 직접 연결하기도 문화 코드가 이어졌다고도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공백을 설명 및 해석하지 못하면 이 이야기는 그저 대충 적당의 속설이고 혹세무민일 뿐이다. 더불어 신라 왕경인 경주시의 중심가에 백제 모관을 당당히 기념물로 만들어 세우고, 금관가야의 상징가로에 신라 금관의 도안을 내 거는 행위 역시 몰역사적이다. 이는 마치 육군이 공군의 군모를 쓰고 사열에 나서는 것과 같으니 영창감이지 않은가.국립경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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