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림 作 |
1+1상품처럼 당당하게 실존하는 나 역시 남들이 나에 대해 뭐라 이야기한들 한순간도 나 아닌 적 없다. 내가 아는 바, 나는 추남이다. 배 아픈 추남이다. 이상한 꿈을 많이 꾸는 추남이고, 자신을 혐오하는 추남이며, 오늘 자살할 추남이다. 그럼에도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이것은 '내가 태어났다'와 같은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절대적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이것을 '심정적 사실'로 추대하면서까지 구태여 사실의 영토에 편입시켜두었다)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배 아픈, 이상한 꿈을 많이 꾸는, 자신을 혐오하는, 오늘 자살할(혹은 이미 죽은) 추남이다. 이런!
지나치게 얼큰하다. 부처는 어떨지 몰라도 내 기준엔 갈비탕이 너무 얼큰했다. 또 배가 아프다. 배가 아프면 나는 뭔가를 부수고 싶다. 하지만 안 된다. 평소의 나는 예의를 차려야 한다. 나는 남자가 주방으로 들어간 틈을 타 살금살금 가게를 빠져나온다.
찾자. 너무 더럽지도 너무 깨끗하지도 않은 화장실을. 너무 더러운 데는 똥 속에서 똥을 싸는 기분이라, 마치 나마저 똥이 된 느낌이라 똥이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너무 깨끗한 곳은 항문 자체적으로 똥과 병립할 수 없는 유토피아로 인식해 똥이 나오지 않는다. 찾았다!
개인 카페. 군데군데 페인트를 덧칠한 걸 보니 오픈한 지는 몇 년 된 것 같고, 무슨 의민지는 몰라도 각종 기타들을 창가에 배치해둔 걸 보니 치장에 아주 손 놓진 않은 모양. 좋다. 아마 화장실도 비슷한 수준일 거다.
화장실은 생각 그대로였지만 도통 똥이 나오지 않는다.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힘을 줘도 마찬가지. 가슴에 무릎을 모아 복압을 높여 봐도 혈압이 올라 머리만 핑 돌 뿐 아무 소식 없다. 똥이 아니라 내가 돌아버리겠다. 똥이 아니라 똥이 돌아버리겠다. 똥이 똥이라 똥이 돌아버리겠다. 똥이 똥이라 똥이 똥. 똥똥(모든) 똥똥똥(현상은) 똥똥 똥(똥이 다).
똥 싸.
그 배 아냐.
설마 임신한 건 아니지?
황급히 바지를 추켜올리고 뒤를 도는데 변기에 뭔가 묻어있다. 피… 가 아니고 방울토마토?
①앞사람이 엊저녁 방울토마토를 씹지도 않고 한입에 삼켰다
②옆에 있던 세면대에서 열정적으로 양치하던 누군가가 양치 끝나고 입가심하려 왼손에 들고 있던 방울토마토를 용솟음치는 헛구역질에 굴복하여 변기에 던져버렸다
③방울토마토가 아니라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대장암 덩어리다
④미친놈. 저건 그냥 피다
출제 오류로 전원 정답처리하고 문을 나서는데 뭐지? 배가 안 아프다. 화장실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단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음 생엔 아빠가 변기였음 좋겠다. 엄마는 뚫어뻥. 그럼 내게 배 아플 일 따윈 없겠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걱정이다. 가끔은 배 아픈 걸 즐겼는데 배 아플 일이 없어진다니 정말 걱정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이 좋은 작가를 만드는 것처럼 복통은 나를 만들었다. 복통 없는 나는 내가 아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는 마인드로 나는 이제 복통을 유희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느새 복통은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 복통으로써만 나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
배가 아프다 간절히 생각하니 정말 다시 배가 아파오는 것 같기도 하다.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다. 타이머를 맞춰야겠다. 이 정도면 5분, 아니 3분. 기분 좋은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과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배 아픈 죄목으로 격리병동에 수용되었던 무시무시한 기억이 엄습해오기 때문에, 나는 기쁨 환희 황홀 충만을 느낄 때마다 잔뜩 긴장해서는 타이머를 맞춘다.
미안합니다.
아뇨, 긴장돼서 일찍 와 있었어요.
나는 3분이 지나길 기다리며 창가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쉴 새 없이 손을 까딱거리고 핸드폰 검은 화면을 보며 앞머리를 자꾸 정리하는 여자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착석한다.
처음이세요?
네…
그럼 더 미안합니다.
아뇨! 감사합니다.
뭐가요?
네?
내가 고마워요?
아… 생각만 한다는 게… 음… 사실… 사진이랑 많이 다르셔서…
정말로 미안합니다.
아뇨! 감사합니다.
아까부터 대체 뭐가…
잘생기셨어요! 진짜로!
널 강간하라고 해!
누가요?
널 착취하라고 해!
코베인 씨…
널 미워하라고 해!
또 네가 불렀어?
네?
널 불태우라고 해!
잠깐만요.
나는 위태로운 십대의 영혼처럼 구슬피 울고 있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전화 받듯 알람을 받는다. Something in the way? Umm, yeah.
미안합니다.
아뇨! 감사합니다.
나한테 화났어?
도망치듯 카페를 나오며 나는 부처에게 묻는다.
열반에 들어야지.
그건 네 사정이고.
그럼 놓아줘.
대체 어디까지?
왜, 무서워?
하나도.
거짓말. 넌 무서워하고 있어.
내가?
나는 보란 듯이 버스킹 하던 길가의 남루한 가수에게서 마이크를 탈취해 날카로운 비명으로 남자들의 사지를 찢고, 그르렁대는 분노로 여자들을 도살하고, 넘실대는 울분으로 노인과 어린이들의 숨통을 틀어막는다. 그러다 순식간에 가수가 연주하는 기타 리프들에 둘러싸여 허공으로 떠올라 저 멀리 지하철역 입구에 버려진다.
아니나 다를까, 개찰구로 내려가는 계단은 정확히 67개였다. 부처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오늘 아침 알약 67개를 뜨거운 물에 녹여 위스키 잔에 한 모금 분량으로 담아두던 내 모습이 떠오르자 나는 갑자기 무서워진다. 67676767둠칫둠칫둠칫둠칫. 중차대한 순간에도 심장박동을 타고 노는 나는 천생 뮤지션이다. 아니 뮤지션이라기보다는 아티스트다. 당연하게도 나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내가 발표하지 않은 작품들이 유튜브를 통해 인스타를 통해 트위터를 통해 통돌이 세탁기를 통해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단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전율한다. 나는 분명 세상에 지대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손톱만큼도 알지 못한다. 그건 내가 통돌이 세탁기를 애용하기 때문이다. 통돌이 세탁기의 강력한 원심력으로 내가(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때'와 동의어다) 전부 빠져나가고 내가 낳은 자식들 내 작품들 내 고름들 내 암 덩어리들만 한 가운데 남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좋다고 핥아먹고 아껴먹고 뜯어먹고 이봐! 제발 정신 좀 차려. 그러다 당신 자리는…
벌써 꽉 차버렸다. 퇴근시간인가? 뭘 했다고… 1-1부터 10-3까지 딱 하나 남았다. 그나마 부처가 나를 배려해 줬다. 그래도 내 생각 해 주는 건 부처뿐이다.
헌데 부처는 왜 내 자리에 분홍빛 물을 들여 놨을까? 대장암과 혈투를 벌이던 내 항문이 피를 싸질러놔도 붉은 계통으로 색깔이 비슷한 핑크 속에 섞여버리면 티 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아마 맞는 것 같다. 나는 죽는것 보다 창피당하는 걸 싫어하니까. 죽어도 가오는 챙겨야 하니까. 이렇게나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한 퇴근 시간, 스물일곱 먹은 젊은 스타가 똥구멍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진다면… 생각만 해도 엽총으로 내 대가리를 날려버리고 싶다.
나만큼 창피를 싫어하는 사람을 나는 살면서 본 적 없다. 나는 창피를 당하면 미쳐버린다. 특히 어렸을 때 자주 그랬었다. 꾸며내는 데에 서툴렀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가장하면서부터, 다시 말하면 교묘하게 꾸며내고 모호하게 포장하고 예민하게 치장하는 기술이 경지에 오른 다음부터, 나는 창피를 잊고 살았다. 검은 비닐 봉다리를 들고 다닐 때보다 짝퉁이라도 에르메스를 들고 다닐 때 창피당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치다.
임신하셨어요?
아까부터 저 방울토마토는 왜 계속 나를 따라다니는 걸까, 고민 중인 나에게 덩치 좋고, 동그란 금테 안경알만큼은 아니지만 광대부근 모공이 상당히 크고, 한눈에 성별을 가려내긴 어렵지만 대충 남자로 추정되는, 그리고 잦은 탈색으로 안 그래도 영양가 없는 머리가 완전 개털이 된, 반인반수를 연상케 하는 요괴 같은 인간이 대뜸 말을 걸어온다.
그럴 지도 모르죠.
지금 장난하세요?
장난칠 기분 아닌데 부처가 또 장난을 걸어오는구나. 아까 카페 화장실에서 똥과 한판 사투를 벌이다 지나가는 말로 임신한 거 아니냐는 농을 던졌던 걸 용케도 기억해둔 부처가 저 반인반수에게 내 생각을 주입한 것이다. 열반을 목전에 두고 있는지도 모를 아라한한테(더 배울 것 없는 상태와 무엇도 배운 것 없는 상태는 똑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라한이다) 이건 너무한 처사 아닌지? 게다가 보는 눈도 많은데… 아니나 다를까 대중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사실 환자예요.
어쨌든 임산부는 아니다 이 말이잖아요?
나는 일부러 몸을 앞으로 고꾸라뜨린다. 갑자기 지하철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보고 놀란 것인지, 아니면 젊은 스타가 이제껏 엉덩이 밑에 방울토마토를 깔아뭉개고 있었단 사실에 놀란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대장에 있던 암 덩어리가 핑크색 좌석을 온통 붉게 물들여놔서 놀란 것인지, 부처의 종용 하에 나에게 장난을 걸어오던 반인반수가 열려있는 지하철 문으로 황급히 빠져나간다.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 그를 쫓는다.
반인반수는 네 발로 기어 개찰구 밑을 통과한 뒤 지상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을 부리나케 뛰어오른다.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도 필사적으로 다리를 휘적대며… 휘적대려고… 휘적대야하는데… 도무지 휘적대지지 않는다. 누군가 내 발을 꽉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정말이다!
괴로워…
계단 시작점에서 자기 영역 주변으로 동그랗게 초를 깔아놓은 노숙자가 내 발을 꽉 붙잡고 있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고 좌우로 고개를 흔든다. 괴로움은 없다. 여기엔 나와 당신만 존재한다.
목말라…
꺼져가는 불꽃 같던 노숙자가 마지막으로 발화하듯 돌연 날쌔게 몸을 놀려 내 왼손을 움켜쥐려 한다. 나는 찌에 물리지 않으려는 민어처럼 재빨리 손을 퍼덕이다 허공으로 튀어 오른 왼손에 이마를 얻어맞고 만다. 별과 함께 노숙자 뒤쪽에 붙어있던 큰 거울에서 이마에 붉은 점이 생긴 내가 보인다.
부처님 제발…
나는 땅에 붙어버린 노숙자를 지나쳐 거울로 다가가 내 얼굴을, 특히 이마를 중점적으로 들여다본다. 미간 위 붉은 동그라미, 그것은 방울토마토 아닌 피다.
SO SAPPY!
불현듯 SAPPY란 단어가 떠오른다. 나는 그것이 SAD와 HAPPY가 합쳐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감상적인. SAPPY는 감상적이라는 뜻이었다. I'M SO SAPPY! 나는 빠르게 감상에 젖어든다. 그 감상은 슬프고도 행복하다.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벗어 노숙자에게 건넨다. 그리곤 말없이 바닥에서 촛불 하나를 챙겨 계단을 오른다. 한손으론 농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그것을 받치고, 다른 손으론 불을 감싸 바람을 막는다.
사실 옷만 벗으려 했는데 옷을 벗는 동시에 돈오돈수 네 글자가 내게 남아있던 유일한 재산, '사실'까지도 절취해갔다. 나는 옷과 함께 내가 태어났단 사실까지도 잃었다. 순식간에 너무도 가벼워진 나는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불이 된 것이다. 커지고 작아지고 타오르고 스러지기를 반복하는, 그러나 한 번 꺼지면 앞으로 다시는 타오르지 않을 불이 된 것이다.
세상으로 나가자 부처의 연락을 받은 친구들이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여래'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나 말고 부처에게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친구의 숫자에 재차 놀랐으며, 그들 얼굴이 모두 불이 되기 전 나와 심각하게 유사하다는 사실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놀랐다.
바로 가시죠.
이것까지 두고 갑시다.
내 말에 여래들이 흐뭇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부처가 그들에게 집 가는 길을 안내한다. 우리는 거칠 것 없이 달려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앞에 도착한다. 여래들이 나를 따르려 하자 부처가 저지한다. 그렇게 단 둘이, 나와 부처만 개구멍으로 들어간다.
대문 앞에서 잠시 부처에게 불을 맡기며, 즉 나를 맡기며, 나는 이생 처음으로 부처와 눈을 맞춘다. 그의 눈 속에 내가 춤추고 있다. 불이 일렁이고 있다. 그 순간, 문고리를 당기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문이 열린다. 나는 부처에게 다시 나를 넘겨받는다.
안은 어둡다. 그래 봤자 여긴 내 집이다. 나는 나를 비춰 어렵지 않게 위스키 잔을 찾는다.
흔들린다. 잔을 들고 한 걸음씩 걸어갈 때마다 잔이 흔들리고, 잔 밑에 깔린 가루들이 흔들리고, 잔을 든, 혹은 잔에 의해 들려진 나까지도 흔들린다. 현기증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열반에 들어야지.
나는 다시 걷는다. 잔에 가루 부딪히는 소리가 처마 끝 짤랑대는 풍경을 연상시킨다. 몹시 평화롭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문까지 통과하자, 촛불들이 욕조에 떠서 어둠과 담담하게 맞서고 있다. 나는 나를 든 손에 힘을 빼고 욕조로 다가가 한 발씩 부드럽게, 최대한 파문을 만들지 않고, 물속에 나를 담는다. 물의 감촉은 편안하고, 편안하고, 편안하다.
나는 나를 위스키 잔 밑으로 가져간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잔으로 원을 그린다. 그러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경쾌한 풍경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눈감고 고개 젖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자 온 몸이 완전히 느슨해진다. 녹아내리는 것 같다. 그럼에도 잔은 원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심지가 타고 있는 한 불은 잠시도 쉬지 않는 것처럼.
점차 풍경 소리가 작아져 간다. 가장 먼저 욕망이 꿈틀대며 빠져나간다. 뒤따라 미움도 분노도 슬픔도, 풍경을 따라 옅어져 간다. 흩어져간다. 사라져간다. 정말로 좋다고 읊조리는 내 이마를 기쁨이 살짝 터치하고는 유유히 문을 나선다. 다시 한 번 정말로 좋다고 읊조리는 내 입에서 즐거움이 튀어나오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제 소리는 너무도 작아져 거의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욕조에 떠 있던 촛불들도 끝까지 타버렸다. 모두 소멸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뜬다. 이는 더 이상 꺼진 초에서 불꽃을 찾아 헤매기 위함이 아니다.
사라진 게 아냐.
나는 나를, 같은 의미로 나를 밝히던 유일한 빛을, 훅하고 불어서 끈다. 동시에 나에 대한 부처의 사랑, 그리고 부처에 대한 나의 사랑을 단숨에 들이킨다.
불타 없어진 거야. 〈끝〉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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