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그단새] 정월대보름에 보내는 기도

  •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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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07  |  수정 2023-02-07 06:42  |  발행일 2023-02-07 제23면

[안도현의 그단새] 정월대보름에 보내는 기도
안도현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정월대보름 달빛이여, 우리 사는 이 땅에 정하게 내리소서. 여기는 백두대간이 소백 죽령 이화령 황악을 거쳐 지리산으로 달리고 낙동강이 봉화 안동 예천 상주 구미 고령을 지나 남해로 넘실 흐르는 고장입니다. 백두대간 힘센 산줄기를 배경으로 삼고 낙동강 푸른 물줄기를 붓으로 삼아 몇 줄의 글을 올립니다.

우리는 오곡을 씻어 안치고 묵나물 무쳐 밥을 먹었습니다. 달빛이여, 혹시라도 들었는가요? 가가호호 호두와 생밤을 깨물어 부럼을 깨는 무서운 소리를. 우리가 부럼 깨는 소리를 듣고 부디 올해는 코로나19 역신이 지구 바깥으로 줄행랑을 치게 하소서. 역병이 이 땅에 다시는 발을 딛지 못하게 하소서. 이제는 마스크를 벗고 말하게 하시고 입술 모양만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게 하소서.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스러운 단어들이 대지에 햇살처럼 달콤하게 녹아들게 하소서.

아침에는 귀가 밝아지도록 찬술도 한 잔 마셨습니다. 달빛이여, 우리가 부디 청정한 두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나쁜 소리는 가라앉혀서 듣게 하시고 좋은 소리는 우리의 입을 통해 더 멀리 퍼지게 하소서. 말을 못 알아듣는 무식한 귀와 말을 왜곡해서 듣는 뻔뻔스러운 귀와 말을 오해해서 듣는 무감각한 귀를 씻어주소서.

정월대보름은 달의 몸이 가장 불룩하게 부풀어 오르는 날입니다. 이 밝고 둥근 달의 정기를 이 땅의 여성들이 들이마시고 달빛을 몸에 감아 부디 건강한 아이를 잉태하게 하소서. 고을마다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어둠을 깨뜨리고 울려 퍼지게 하소서. 머지않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깨알처럼 흘러넘치도록 하시고, 그 웃음소리가 나라를 이끌고 가는 동력이 되게 하소서.

달빛이여, 돈 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게 지갑을 여는 날이 자주 있게 하시고, 주먹이 센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일이 많게 하소서. 내가 잘되는 것보다 남이 잘되는 일을 더 기뻐하게 하소서. 내가 웃고 있을 때 어디선가 울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크고 화려한 것만 따라가느라 발바닥이 부르튼 사람에게는 길가의 작은 민들레를 보여주시고, 고층과 고수익만 따지는 사람에게는 오래된 정미소의 양철지붕을 보여주소서.

정월대보름에는 윗사람보다 아랫사람이 집안과 회사와 단체와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하소서. 세상을 여기까지 튼튼하게 키운 어른은 더 젊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고 조금이라도 기회를 찾게 하소서. 윗사람은 아래로 지시하기보다 허리를 숙여 경청하게 하소서. 아랫사람이 겸손하게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무한한 자신감을 심어주소서. 두 팔을 휘저으며 거들먹거리며 살게 하지 마소서. 기어이 낮은 곳을 찾아가는 빗방울의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달빛이여, 달집을 만들어 어둠을 태우며 이제 불꽃을 올립니다. 이 불꽃이 뿔뿔이 흩어진 우리의 마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게 하소서. 이 뜨거움이 올해 한 해 우리의 삶의 눈부신 열정이 되게 하소서. 올해는 우리 앞의 쌀 한 톨, 종이 한 장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사색하게 하시고, 한 권이라도 책을 더 읽게 하소서. 저 북쪽 우크라이나 땅에 전쟁이 종결되어 평화를 찾게 하시고, 저 남쪽 미얀마 사람들이 군부 정권의 압제와 공포에서 속히 벗어나게 하소서. 우리는 토끼처럼 순한 사람들입니다. 당장 우리 앞의 가스비와 계란값을 걱정하지 않도록 해주소서.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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