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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영화평론가) |
지난 1일, '위플래시'(2014)와 '라라랜드'(2016)의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연출하고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가 주연한 '바빌론'이 개봉했다. 무성영화기에서 유성영화기로 넘어가던 시기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영화인들의 흥망성쇠를 다룬 이 작품은 북미 개봉 당시부터 영화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영화의 제목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가장 화려했으나 한순간에 몰락해 버린 도시, 바빌론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라라랜드'가 LA를 꿈과 로맨스가 있는 낭만적인 공간으로 포장했다면, '바빌론'은 같은 공간을 지난했던 영화사(史)의 무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감독과 배우들의 이름값에도 불구하고 관객 수는 열흘 동안 12만명 정도로 매우 초라한 편이다. 같은 시기에 이렇다 할 경쟁작이 없었음에도 박스오피스 1위를 찍은 적이 하루도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일 정도다. '라라랜드'를 그토록 사랑했던 관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흥행 참패 원인으로는 먼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최근작 '퍼스트맨'(2018)이 전작들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닐 암스트롱의 달착륙 비하인드를 다룬 '퍼스트맨'은 다소 평이해서 인상적인 작품이 되지는 못했다. 또한 '바빌론'에는 영화사 초창기 영화인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양가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데, 그 애매한 태도가 서사와 논지를 흐려놓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를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특히 감독조차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지 몰라 '사랑은 비를 타고'(1952)에 기대어 영화에 대한 애정만 절절히 고백하는 마지막 시퀀스는 무척 실망스럽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만으로 형편없는 관객 수를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바빌론'은 실관람객들과 영화 전문가들의 평점 차이가 상대적으로 적은 작품이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공히 갖추고 있다는 의미인데, 입소문이 많은 것을 좌우하는 영화 시장에서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장점이다. 그렇다면 영화 외적인 요소가 영화의 흥행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바빌론'은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무성영화기 스타들의 운명과 비슷한 맥락에 있는지 모른다. 즉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속화한 OTT 시장의 성장은 약 100년 전 영화사의 흐름을 확 바꿔 버린 유성영화의 등장에 비견될 만하다. OTT 콘텐츠들과의 경쟁 속에서 이제 극장개봉용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불러들일 확실한 명분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기준에서 '바빌론'은 매력적인 작품이 아니다. 느리고 지루한 예술영화도 아니지만 '라라랜드'처럼 연인들과 보기 좋은 뮤지컬 영화도 아니며, 가족 나들이용으로도 적합하지 않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189분이라는 러닝타임의 압박이 크다. 이제 관객들은 '아바타: 물의 길'(2022)처럼 입체적으로 새로운 행성을 탐험시켜주는 게 아니라면 굳이 돈 내고 3시간 넘게 영화관에 앉아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바빌론'에서 한 영화평론가는 왜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를 비웃었는지 궁금해하는 무성영화기 스타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유는 없어. 그냥 시대가 변한 거야." 그러니, '바빌론'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데이미언 셔젤과 비슷한 영화적 경험을 공유한 세대로서 LA LA 랜드(할리우드)의 위기를 보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그러나 영화가 어떤 플랫폼에서 무슨 형식으로든 살아남아서 몇 세대 후에도 영화를 향한 연서를 써 보낼 날이 있으리라 믿고 응원한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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